아래의 글들은

불기 2547년(2003) 1월30일부터 2549년(2005) 11월23일까지

과거의 <자유게시판>에 올려져 있던 글들입니다.

다시 읽어 보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서 HTML 문서로 만들어 보관합니다.

우측의 번호에서 보듯이

나중에 올린 글일수록 위에 실려 있습니다.

몇몇 분들이 자신이 올렸던 글을 삭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읽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205
이 름 황우성 2005-11-23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스스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고 고민을 해도 도저히 그 답을 얻지 못했을때 던지는 질문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즉흥적인, 자의적인, 희론에 가까운,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의견이나 질문등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김성철 교수님에게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소비시키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 합니다.

모든 글은 실명을 원칙으로 함이 마땅합니다. 지혜를 구함에 있어 실명을 쓰는 것은 아무런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부디 앞으로도 훌륭한 공부방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이런 방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글수정,삭제No. 204
이 름 강병균 2005-11-23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정든 싸이트를 닫으시려 한다니 착찹합니다.
만약 옮겨가려는 싸이트 역시 익명으로 글을 게재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유게시판이라는 이름이 좋았읍니다. 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계속 자유라는 좋은 이름이 들어있는 게시판을 유지하시기를 희망합니다. 만약 익명이 문제라면 실명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읍니다. 불교라는 생사를 건 일대사 가르침에 실명을 걸지 못 할 이유가 특별히 있는지 잘 생각나지 않읍니다.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203
이 름 이대길 2005-11-23
남 긴 글 교수님께

익명으로 하는 온라인의 결함으로 뜻하지 않게 많은 생각을 낳게 하는군요.

그러나 교수님의 자유게시판은 지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모두 실명으로 올리는 것만 질문에 응하는 방법을 고려해 주십시요.

비록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지만,교수님의 넓으신 자비와
양보로 계속 진행되길 원합니다.

저또한 이렇게 살아있는 자유게시판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배우고 있답니다.

부디,한번 더 지켜보시고 다음에 또 문제가 발생되면 다시 판단하심이 어떨까요.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202
이 름 김성철 2005-11-22
남 긴 글 익명으로 운영되는

본 게시판을 너무 오래 열어 놓다 보니까

간혹 부작용과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본 게시판의 수명이 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 좋은 질문 올려주신

방문객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강병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 던지신 질문과

사려깊은 조언 덕분에

저 역시 그 동안의 제 공부를 정리해 볼 수 있었고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의 삶과 접목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며칠 내로 본 게시판을 닫겠습니다.

앞으로는 아래의 <불교교리문답게시판>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201
이 름 김성철 2005-11-22
남 긴 글 본 자유게시판이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긴 하지만

방문자께서 올린 질문에 대해 제가 답글을 올린 경우

애초의 질문을 삭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 제3자가 본 게시판에 들어와 글을 읽을 때

질문 없는 제 답글만 보고서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제 답변만 있고 질문이 없는 글들이 가끔 보이는데

이 모두 질문한 분이 글을 내린 경우입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200
이 름 깨어있는 마음 2005-11-21
남 긴 글 교수님. 불교방송에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강의하신
것을 요즘에 하나씩 보고 있는데요.
정말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게시판을 계속 쓸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글수정,삭제No. 199
이 름 김성철 2005-11-20
남 긴 글 본 게시판 문제로
네이버 담당자와 이메일을 주고 받은 적이 있는데
담당자가 게시물 제한을 풀어 준 듯 합니다.
 
글수정,삭제No. 198
이 름 김성철 2005-11-20
남 긴 글 지난 금요일 새벽 4시에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 승주의 모 사찰에 갔다가

10시간 강의하고

지금 일요일 밤 11시에 집에 들어와

처음 홈페이지를 열어 봅니다.



초심님 올리신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저는 불전에 의거해서 답합니다.

또 제 생각과 생활을 불전의 가르침에 맞추어 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성은 탐욕의 일부입니다.

탐욕, 분노, 교만, 그리고 잘못된 종교관

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이런 탐, 진, 치, 만을 제거하는 것이 불교수행입니다.

삼계 가운데 욕계에만 남녀, 음양, 암수의 성이 있습니다.

색계와 무색계 중생은 성욕을 초월한 천신들입니다.


이 이상 <불교와 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책이 한 권 될 겁니다.


이번 호 <불교평론>에

<불교와 성> 특집 논문들이 실려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글수정,삭제No. 197
이 름 쿨.쿨.쿨. 2005-11-20
남 긴 글 중생을 윤회하게 만드는 동인이 언제나 타는듯한 갈애
욕망 특히나 성애 애욕 같은 성적인 갈구때문입니다.
성은 실지로 하나의 도구정도이지만 성때문에 중생들이
고통의 바다인 윤회를 못벗어나서 그래요.

가령 우리가 처음으로 자장면을 맛본 시골아이는 그 자장면이 맛있다고 그것밖에 생각할줄 모르지만 그보다 훨씬 고급의 음식을 먹어봐야 그전의 그토록 호들갑스럽든 자장면이 별볼일 없는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성욕 즉 열반을 향한 성애 그리고 실질적인 그 희열을 맛보아야 해요.
 
글수정,삭제No. 196
이 름 김성철 2005-11-17
남 긴 글 가능하면 네이버 담당자에게 부탁하여

본 게시판의 유료전환을 노력해 볼 예정입니다만,

혹 불가능하다면 본 게시판은 그냥 놔두고

그 다음부터의 문답은 본 홈페이지 내

<불교교리 문답게시판>에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195
이 름 강병균 2005-11-17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게시판이 얼마 안 남았으면 게시판이 없어지는 건가요?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194
이 름 김성철 2005-11-17
남 긴 글 밀교도 정통불교입니다.

초기불전의 경우도 그 용어들 대부분이

바라문교의 우빠니샤드와 사문의 종교에서

사용하던 것들입니다.

다만 그 해석을 달리 했을 뿐입니다.

초기불교 이후 밀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중한 정통불교입니다.

어떤 단계의 불교든 자신과 인연이 되어

자신의 심성을 향상시켜 주면 정통 불교이지만

그 반대로 교만심과 탐욕, 분노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이용할 경우,

그 사람에게 불교는 마구니의 설일 뿐입니다.

티베트의 쫑카빠(1357-1419) 스님의 <보리도차제론>에서

이와 같은 식의 답이 발견됩니다.

이제 게시판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일반적인 얘기는 스스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93
이 름 김을배 2005-11-17
남 긴 글 그렇다면 tantra불교는 불교라기보다는 힌두이즘불교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불교의 전개에서 초기불교-부파-대승-밀교-tantra

교수님께서는 어느 시대의 불교가 가장 불교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보는 지요?

 
글수정,삭제No. 192
이 름 김성철 2005-11-17
남 긴 글 본 자유게시판은

네이버에서 가져온 무료방명록입니다.

그런데 글을 200개까지만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유료전환을 하면 더 올릴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방명록이 너무 오래된 구방명록이라서

그대로 유료전환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게시판을 아껴서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91
이 름 김성철 2005-11-17
남 긴 글 아래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Tantra불교와 밀교는 동의어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Tantra불교, 또는 밀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Tantra불교에 대한

제 독특한 생각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밀교에는 힌두밀교와 불교밀교의 두 가지가 있는데

불교밀교는 힌두밀교의 불교적 변형입니다.


불교밀교에서는 '부모존(Sex하는 모습의 불상)',

만뜨라(진언), 무드라(수인), 만다라(도상) 등등

근본불교에서 비판되거나 보지 못하던

종교 의식과 도구, 존상 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런 의식과 도구, 존상의 기원에 대해 학설이 분분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힌두교에 기원을 둔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 말기에 힌두교 세력이 커지자

불교 측에서 힌두교의 종교 도구 등등을 빌어 온 후

불교적으로 다시 의미부여함으로써 구성해 낸 것이

불교밀교라고 생각합니다.

힌두밀교 존상의 경우

남존(男尊)인 시바와 여존(女尊)인 샤크티의

교합상(sex)이 세계의 창조를 상징하는데

불교밀교에서는 이 존상의 외형을 그대로 빌어 온 후

남존은 '자비 방편', 여존은 '반야 지혜'을 상징한다고

다시 의미부여를 한 후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자비와 지혜를 모두 갖춘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겉 모습은 힌두밀교와 같지만

그 의미 부여는 전혀 다릅니다.

만다라, 무드라, 만뜨라 등등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힌두밀교의 수행과 상징물에 새롭게 의미 부여를 함으로써

재창출된 것이 바로 불교밀교입니다.


둘째, 밀교 수행을 한 마디로

'시청각 도구와 놀이를 통한 수행'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초기불전에 씌어있는

제행무상,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이치에 대해

아무리 많이 읽고 생각해도

우리에게 이 가르침이 체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래만다라' 만드는 수행을 되풀이할 경우

무상의 이치가 체화됩니다.

몇 날 몇 달에 걸쳐 색모래로 정성껏 만다라를 그린 후

완성되면 다 지워버립니다.

(모래만다라 수행과정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영상자료> 페이지에 올려 놓은

모래만다라 플래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 만다라에 그려진 존상들을 보면서

자신을 그 존상과 동화시키는 생기차제와 구경차제 수행은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입니다.

운동선수들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운동능력을 키우듯이

밀교수행자는 만다라를 통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자비롭고 지혜로운 부처의 성품을 갖추게 됩니다.


이 이외에 밀교와 관련된 내용은 인터넷 상에서

스스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90
이 름 김을배 2005-11-16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근본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에서 Tantra불교로
흐름을 잇는다하는데

인도의 tantra불교는 무엇이며 또한 불교속에 포함되는가요?

좀 자세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189
이 름 김성철 2005-11-16
남 긴 글 어쨌든 아래의 윤성욱님, 시심마님

두 분 글이 인연이 되어

저도 음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음행과 관련한 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혹 이 글을 보고 도움을 받는 분이 있을 수도 있구요.

감사드립니다.

-------
그리고 신오유 선생님 좋은 논문 쓰시기 바랍니다.

논문과 관련된 일반적 지침은

<경주 동국대 내의 제 홈페이지> 공지사항 난에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정신분석학과 불교 유식학을 관련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일 텐데,

경주 동국대에서 유식학을 강의하시는 이만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 고려대장경 사이트로 들어가서

<불교관계논저목록 검색> 기능을 활용하면

이만 교수님의 논문 이외에도

유식학과 심리학을 비교한 많은 논문 목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먼저 남들이 쓴 논문을 숙독하신 후

자기 나름의 주제를 잡아 집필하시기 바랍니다.

또 남들이 쓴 논문에 실린 <참고문헌> 목록을 통해

좋은 자료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글수정,삭제No. 188
이 름 시심마 2005-11-16
남 긴 글 저 역시 언어표현에 문제가 있고
유마의 불이의 마음이 한참 못되어서 지웠습니다.

치열한 범행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무애의 경지에 갈수 있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187
이 름 윤성욱 2005-11-16
남 긴 글 교수님

성욕에관한 다양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지운것은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어서입니다.

"석존께서 전생에 보살로 계실 적에 ...." 라는 글이 잘못되었습니다.

석존께서 말씀하시길 "옛날 어느 성자(보살)이 ..."였습니다.

동국지 98을 재확인 해보니 제가 잘못 읽었습니다.

그래서 지웠습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글수정,삭제No. 186
이 름 신오유 2005-11-16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제 졸업논문,(석사)를 쓰려고합니다.

제목은 " 식(심층심리)에서의 유식과 분석심리학의 비교고찰"인데 어떻게 시작하며 또 꼭 지켜야할 논문의 규칙 그리고

주의점등이 있다면 좀 말씀해 주시죠?


 
글수정,삭제No. 185
이 름 김성철 2005-11-15
남 긴 글 183번 이후의 제 글들은

어떤 분(유성욱?이란 이름)이 올린 음행과 관련한 물음에 대한 답글입니다.

제가 스스로 음욕을 어떻게 제어하는지

물은 데 대해 답을 한 것인데

질문을 올렸던 분이 글을 지워버렸네요.
(이 이외에도 질문없이 제 답글만 보이는 경우는 질문자가 나중에 자신의 질문을 지운 경우입니다.)

느닷없이 올린 듯이 보이는 제 글에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질문을 스스로 삭제하고 나가셨지만

혹 도움을 받는 분이 계실지 몰라서

제 답글은 그대로 놔둡니다.
 
글수정,삭제No. 184
이 름 김성철 2005-11-15
남 긴 글 아래 "시심마"님께서

"성인들이 행위는 어떠한 것이든 자유롭고 죄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보다는

"성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죄라고 생각될만한 행위를 절대 하지 않습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는 공자님 나이 70에 이룬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이는 멋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입니다.

악행을 억지로 참으며 착한 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살아도 너무나 착한 행동만 하는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불교를 잘못 공부할 경우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아무 행동이나 멋대로 하고,

아무 것이나 멋대로 먹고 마시는

'막행막식의 무애행'을 일삼는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견인(邪見人)>이라고 부르고

'유식학'에서는 <악취공자(惡取空者)>라고 부릅니다.

<사견인>이란 '삿된 세계관을 갖는 사람'이란 의미이고

<악취공자>란 '공을 잘못 파악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사견인, 즉 악취공자는 '입으로는 공을 얘기하나

탐욕, 교만, 분노 등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음욕 역시 탐욕 중 하나입니다.


음욕과 분노와 교만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여

'선도 악도 없다'든지, '계율도 다 공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악취공자입니다.



세속적 분별이 남은 사람은 그나마 착한 척 하면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데

이 악취공자는 도덕을 파기하는 것이

도인이라고 착각하고서

사음, 음주, 망언, 등 마치 광인과 같이 살아갑니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이런 광인과 같은 사람을

도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즈니쉬의 사상에서는

악취공적인 기미가 많이 느껴집니다.

비윤리를 초윤리로 착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의 금욕생활을

'칼날 위를 걸어감'에 비유할 정도로 힘들어 한 것은

동료나 기자, 추종자 중의 여자들을 격의 없이 대하며

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디가 이성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살았다면

큰 갈등 없이 브라흐마짜리야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도

두 어린 소녀의 부축을 받으며(신체 접촉)

활동했습니다.

이것이 간디에게 사회운동의 활력을 주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간디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라즈니시와 같은 방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성에서 해방되는 것은

라즈니쉬 식의 Free Sex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금욕을 통해 성취됩니다.


그리고 <사분율>과 같은 율장에 열거된 규정을 지키면서

이성을 대할 때 음욕 통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따운 여성이 방긋 웃을 때 보이는

치아와 연결된 해골을 떠올림으로써 음욕을 없앴다는

일화가 청정도론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부정관의 일종으로,

저도 가끔 해 보는데 아주 잘 됩니다.

해골에 얇은 가죽 가면을 뒤집어 씌어 놓은 것이

사람의 얼굴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아무리 핸섬해 보여도

모두 해골을 덮은 가죽 가면의 모습일 뿐이며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 점을 상상할 때

음욕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관법의 출발점은

상대방이 웃을 때 보이는 '치아'입니다.
 
글수정,삭제No. 183
이 름 김성철 2005-11-15
남 긴 글 저와 같이 결혼생활을 하는 재가자의 경우

사음(邪淫)만 금할 뿐입니다.

--------------

남자 수행자의 경우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음욕이라고 합니다.


어느 수행자가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원에서 수행한 후

지도 스님과 대담할 때

어느 영국인 재가자가 음욕의 괴로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국인의 나이가

근 80세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율장은 읽기 민망할 정도로

음행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 그렇게까지 경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음욕 의 오욕 가운데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음욕이라고 합니다.


음욕을 제어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음욕을 일으키는 대상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12연기에서 촉 때문에 수가 생기고

수 때문에 애가 생한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촉과 수가 없어야 애가 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이든 어깨든

이성의 몸에 접촉도 하지 못하게 하지만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여자 불자님들의 경우

비구스님을 대할 때

그 분들의 청정을 훼손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팔짱을 껴도 안 되고 악수를 해도 안 됩니다.

절대 비구 스님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 링 린포체 스님이 오셨을 때

우리나라 여자 신도 분이 자신의 어린 딸(5세 정도)을

한 번 안아 달라고 스님께 부탁하자

링 린포체 스님께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구는 여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했으며

그 때 그 여자 신도분은 실망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감동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5세 어린 여자 아이인데도....

----------

마하트마 간디의 경우

부인의 동의 하에

36세에 브라흐마짜리야(梵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성생활을 하지 않기로 맹세한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 권리를 위해

사회참여활동을 하다가 밤에 집에 들어와

부인과 Sex를 할 때마다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Sex는 무척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이타적 활동을 하는데

밤에는 지독한 이기심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Sex를 한다는 것을 간디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음의 생활을 한 간디인데도,

그 전기를 보면

성욕을 참는 자신의 생활이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고 고백합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기 전까지는

성욕을 제어할 수 있을 뿐이지

완전히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경계 경계마다 항상 제어하고 살 뿐

성욕을 완전히 끊지 못한 무명중생입니다.

그리고 재가자이기에 사음만 금할 뿐입니다.
 
글수정,삭제No. 182
이 름 2005-11-12
남 긴 글 불생불멸님 !
님께서는 책을 던지시고 禪을 하는 분인가요?
유감스럽게도 님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禪을 하시는 분의 향기라면 그다지 향기롭게 느껴지지 않는군요.
당신안에 들어있는 잘못된 견해를 모두 집어 던지시고 어떠한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신지 다시 시작하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글수정,삭제No. 181
이 름 황우성 2005-11-12
남 긴 글 김 성철 교수님의 홈페이지를 처음 접하여 반가운 마음
그지없읍니다.
그동안 너무 적조했던 점 부디 양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항상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예전과 같습니다.
원하셨던 체계불학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식구들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글수정,삭제No. 180
이 름 이대길 2005-11-11
남 긴 글 no.176의 불생불멸님께

주관적인 나만의 생각은 좀 지양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경허스님께서 호열자에 걸려 같이 죽어가면 좋겠습니까? 꼭 그래야만 생과 사를 구분않는 성자일까요?

자기만의 생각은 자기만으로 간직하면 그것이 수행일지도 모릅니다.

김성철선생님처럼 온화한 모습과 어느누구에게라도 하심으로 조용조용 지식을 전달합니다.]

이 홈에는 궁금한 불교의 사상을 문의하고 답변하는 법당입니다.

그리고 '남보다 경지가 높다'는 것은

'남보다 더 착하고, 겸손하며, 슬기롭고,

항상 남을 돕고 사는 것 등등'을

의미합니다.

불생불멸님!

너무 염려마시고 마음 편하게 공부 하시길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79
이 름 김명석 2005-11-10
남 긴 글 교수님..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그렇게 어렵거늘
부질없는 세상걱정과 필요이상의 세속적 욕망과 그만큼의 허무,
향락속에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얼마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어져 있는지 새삼 무서운 감정이 듭니다.
 
글수정,삭제No. 178
이 름 김성철 2005-11-10
남 긴 글 부처님과 아라한이 열반에 들면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다른 모든 중생은 죽은 후 반드시 태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아라한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윤회를 모를 때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

공포스럽게 느껴지지만,

수천억 겁 동안 계속 되어 왔으며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이상

앞으로도 무한히 윤회해야 하는 숙명을 떠올리면

열반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열반'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내생에 다시 이 정도의 인간으로 태어나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초기불전에 기술된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현생의 60억 인류 가운데

전생에 인간이었던 사람은 거의 없으며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사람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눈 먼 거북이의 비유(맹구우목),

손톱 위에 얹은 흙의 비유 등을 통해

생명의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몸을 갖고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르치십니다.

수천억 겁 동안 무한히 윤회하는 대부분의 삶은

짐승, 아귀, 지옥중생의 삶입니다.

그런 고통의 세계에 지긋지긋하게 태어나다가

수 천 년에 한 번 정도 겨우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내생에는 절대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샘솟습니다.

이런 자각이 고, 집, 멸, 도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에 대한 자각입니다.

삼법인 가운데 일체개고에 대한 자각입니다.

물론 이런 고성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철두철미하게 자각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무상하게 흘러가기에(제행무상)

내가 영원히 안주할 곳이 없습니다(제법무아).

이를 자각할 때

열반하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샘솟습니다(열반적정).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성제를 모르기에

내생에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게

모든 번뇌를 제거한 아라한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고결한 삶은 완성하였고, 할 일을 다 했으니,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내 스스로 안다.>

이를 '해탈지견(解脫智見)'이라고 부릅니다.

예불문에서 아라한이나 부처님께서 갖추신

다섯 가지 공덕(오분법신)에 대해 향을 올릴 때 말하는

'해탈지견향'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깨달은 분은 계, 정, 혜도 완전히 갖추고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기도 했지만(해탈),

스스로 자신이 해탈했다는 사실을 압니다(해탈지견).

누군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스승도 아니고, 도반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던,

음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재물욕 등의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어리석음이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사라졌는지 여부는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탐, 진, 치, 만 등의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수행자는 마음에 맺힌 것이 없기에

죽은 후 그 귀신이 다시 자궁에 달라붙지 않습니다.

물론 귀신으로 형성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보현행원에서 시방의 부처님께

"제발 열반하지마시고 오래도록

이 윤회의 세계에 남아 계시어

우리에게 가르침과 가피을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기도하듯이 완전히 깨달은 분들은 사라집니다.

윤회의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번뇌를 제거한 위대한 성자이신

부처님과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입니다.

----
혹 열반 후 사라지는 것이 무서우면

열심히 번뇌를 제거하며 수행하다가

죽기 전에 살짝 번뇌를 내면 됩니다.

그러면 내생에 위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과 같은 천신으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인간 중에 엄청난 성자로 다시 태어납니다.

또 성불할 때까지 계속 태어나며 중생을 돕는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모두 이렇게 일부러 번뇌를 낸 분들입니다.

그러니 '사라짐인 열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열반의 사라짐'을 색에 비유하면

모든 색이 없어진 검은 색의 사라짐이 아니라

모든 색이 혼합된 총천연색의 사라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반에 대해 얘기는 하지만

이는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글수정,삭제No. 177
이 름 김명석 2005-11-09
남 긴 글 교수님...

언제나 좋은 정보와 친절하고 자상하신
말씀에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에서 열반의 안락만을 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사의 세계에 환생해서 부지런히 중생들을 이쪽차안에서 저쪽피안으로
나르는 보살들의 눈부신 활동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고타마 부처님처럼 완전한 열반에 드신
분은 다시 현상세계에 모습을 나툴수는 없는지요...

전통적인 불교에서의 견해와 혹이라도
교수님의 개인적 견해를 아울러 알고 싶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김명석 합장

 
글수정,삭제No. 176
이 름 김성철 2005-11-09
남 긴 글 저를 포함하여

여기 오는 분들 중에

자기가 남보다 더 경지가 높다고 착각하는 분들은

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아래 글을 올리신 '불생불멸'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남보다 경지가 높다'는 것은

'남보다 더 착하고, 겸손하며, 슬기롭고,

항상 남을 돕고 사는 것 등등'을

의미합니다.

불교전문용어로 설명하면

'탐, 진, 치, 만'과 같은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

경지가 높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설혹 누가 자신이 경지가 높다고 착각한 들

남에게 해될 것은 없을 겁니다.



무골호인과 같은 완전한 성자가 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부디

모든 사람들이

좀 더 착해지고,

질투심도 없어지고,

단 한 번의 화도 내지 않게 되고,

잘 난 체 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다른 종교에 빠지는 어리석음도 없애고,

매사에 슬기로우며

항상 편안한 사람으로 향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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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175
이 름 과객. 2005-10-30
남 긴 글 요즘 길을 걷다보면 낙엽들이 수북히 밟히죠.

흠...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네요...

모든것들이....

좋은 시간들 되세요.....
 
글수정,삭제No. 174
이 름 불심행 2005-10-27
전자우편 bulsimhng@naver.com
남 긴 글
교수님 사이트를 늘 찾다보니 교수님 근황은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건강히 연구 잘~ 하시고 계시다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아래의 강교수님과의 문답글은 정말 너무 요긴한 말씀이라 읽고 또 읽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저를 잘 모르시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보람있는 휴식년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불심행 합장.
 
글수정,삭제No. 173
이 름 강병균 2005-10-25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친절한 답신 감사합니다.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172
이 름 김성철 2005-10-25
남 긴 글 강 교수님 말씀대로 연기법(緣起法)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연기법에서 불교의 종교성, 불교의 철학,

불교의 윤리관, 불교의 실천행 등 모든 것이 연역됩니다.

그리고 '연기 즉 공'이라고 하듯이

연기의 자각은 그대로 공성(空性)의 자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空中無 ... 云云' 하듯이

공성의 궁극에서는 언어화 된 부처님 가르침조차

모두 버립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가르침이

다 불교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진정한 불교와 무관합니다.

쓰려면 다 쓸 수 있고, 버리려면 다 버릴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잘못된 법화경 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문제점은

'도저히 다 버리지 못함'일 겁니다.
 
글수정,삭제No. 171
이 름 강병균 2005-10-25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친절한 답신 감사합니다.

제가 며칠전에 미국에 갔다 격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읍니다. 테네시주에 있는 낙스빌시에서 시내버스를 탔읍니다. 그런데 그 버스 운전사가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읍니다.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버스에서 내리는데 이 분이 조그만 팜플렡을 하나 주는 것입니다. 표지에 이리 적혔읍니다.

"What you miss by being a christen"
("기독교인이 됨으로서 잃어버리는 것")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읍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말입니다. 분명이 그 버스운전사는 기독교인것 같은데 기독교인이 되면 뭘 얻는다고 해야지 왜 잃는다고 했나하고 의아해했읍니다.

바로 뒷쪽을 보는 순간 의문이 풀렸읍니다.

"Hell"

이라고 주먹만한 글씨 하나만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담 페이지에는 기독교경전에 등장하는 지옥에 대한 묘사 10 여군데를 인용해놓았읍니다. 그중 하나는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에게 자비를 애원하는 곳"이라는 지옥에 대한 묘사가 있었읍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사람이 고통을 못이겨 하나님에게 자비를 애원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지옥에서 벌을 받게 한다고 합니다.정말 야만적인 교리가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교리에 따라서 사람이 선량해 진다면 말입니다. 즉 지옥에 안가기 위해서 선량한 사람이 된다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선량해 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읍니다.

진정한 지혜에 의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지 저는 묻고 싶읍니다. 신비한 기적적인 현상에 의지해서 감화를 받는 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해가 아닐 것입니다.

법화경에는 지옥얘기와 더불어 신비한 이적들이 등장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등장을 합니다. 이들은 모두 원시불교입장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있읍니다. 저는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잘 못 믿으면 아주 위험한 경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지로 법화경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종파를 본적도 있읍니다. 그 종파는 교주격인 스님의 설법중에 이런 말이 있읍니다. "법화 신자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는다." 법화경에는 이런 내용이 실지로 있지 않읍니까?

제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법을 깨달은 것으로 압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신비한 이적적인 것이 연기법의 가르침속에는 있지 않읍니다.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읍니다.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170
이 름 김성철 2005-10-25
남 긴 글 대승불전이 부처님 가르침인지 여부는

대승불교 탄생 이후 계속 논란거리가 되어 온 문제이며

누구나 수긍할 수 있게끔

이에 대한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다음에 쓰는 글은

강교수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대승에 대한 제 개인적 견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서양에서 현대 불교학이 발생하면서 학자들은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것'을 추구하는 이런 태도는

불교 연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근/현대의 신학자들은

진정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구해 왔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왜곡된 예수가 아니라,

진정한 예수를 찾는 신학이 왕성하게 연구되었는데

이를 크게 묶어서 자유주의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에서 발견되는 이런 태도는

'이성'을 맹신하는 '근대성(Modernity)'에 토대를 둡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성'에 의해 '사실'을 추구하는

'근대적 학문 방식'은

기나 긴 인류 역사에서 최근 백여 년 간 유행하고 있는

특수한 학문방식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시작된 서구인들의 이런 학문 방식이

불교 연구에도 그대로 도입됩니다.

근/현대의 불교학자들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발견하기 위해

초기불전 연구에 매달렸는데

결국 이들은 초기불전 속에도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이 많이 삽입되어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러면 불교학방법론에 대한 이런 조망에 토대를 두고

이제 대승불교를 포함하여 불교전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교는 마치 양파와 같습니다.

까도 까도 정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 바나나와 같은 과일의 경우

껍질을 깐 후 알멩이를 먹습니다.

그런데 양파가 이런 과일과 다른 것은

그 껍질을 먹는다는 점입니다.

알멩이를 찾으려고 양파 껍질을 계속 깐다면

결국 양파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불교는 물론이고 모든 종교가

이런 양파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접하는 가르침을 통해

나의 종교적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고,

나의 심성과 인지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각 종교인들은 그 각각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나름의 신화에 의거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동정녀 잉태, 부활, 기적 등등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인도의 힌두교는 더 합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인들은 코끼리 얼굴에 사람 몸을 한

'가네샤'신을 가장 좋아합니다.

가네샤 탄생일도 있고

그 탄생일에는 전국적으로 축제를 벌입니다.

가네샤는 원래 시바신의 아들인데

시끄럽게 떠들다가 낮잠 자는 시바를 깨우게 되자,

분노한 시바가 칼로 머리를 잘라 죽여 버립니다.

나중에 시바의 부인이 이를 알고 슬피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지나가던 코끼리 머리를 잘라 가네샤의 몸에 붙여

살려냅니다. 이것이 가네샤 신화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신화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화는

'테레사 수녀'와 '슈바이처 박사'등을 탄생시켰으며,

힌두 신화는 '마하트마 간디'를 탄생시켰습니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신화는 모두 거짓말이긴 하지만,

우리를 개조시키고 성자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거짓말'입니다.

허황한 어떤 종교의 교리를 믿는 사람에게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득해도

그는 그 종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앉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나 '과학'이나 '이성'보다 더 깊은 것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교인 스스로도

머리로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이

다 거짓말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감성은 그 종교를 버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마징거 Z' 만화영화를 본 어린아이가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뛰어다지면서

'나는 마징거 Z다.'라고 소리지르며,

'정의의 사자' 흉내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도 그 만화가 거짓말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만화의 주인공처럼 행동합니다.

어른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배우들의 연기일 뿐'인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두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보고 울고 웃고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바보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사실을 추구하지만,

종교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지성의 변화'를 목적으로 삼습니다.


초기불전에서 지혜와 자비 등등을 가르치지만,

초기불전의 경문들을 아무리 읽어도

내가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등

대승불전의 신화를 진심으로 가슴에 담는 사람은

'강력하게 변화합니다.

<아함경> 등의 가르침을 아무리 읽어도

변화하지 않던 사람도,

대승신화를 통해 성인으로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종교적 가상'의 힘을 수행에 적극 활용하는 종교가

바로 티베트의 밀교입니다.
 
글수정,삭제No. 169
이 름 강병균 2005-10-25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작은 잘되고 계신지요?

지난번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한 질문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쓰셨읍니다.

또, 벨기에의 가톨릭 주교였으며 저명한 불교학자였던 고(故) 에띠엔느 라모뜨 교수는 이런 대승보살과 대승불전은 불교수행자가 삼매의 상태에서 만난 영적인 존재들과 그들이 구술한 가르침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만약 라모뜨 주교의 말을 수용한다면 이는 대승경전은
마치 귀신의 말을 옮겨적었다는 비판을 수용할 위험에 직면합니다.

[2]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 "여시아문"등으로 줄기차게 주장하는 역사적사실로서의 경전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3]만약 불보살들이 대승의 수행을 해야만 나타나는 존재라면 이는 보편타당한 불법이 될 수가 없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카토릭주교인 라모트의 이론을 빌려 불교를 설명해야한다면 잘못하면 마설을 받아드리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168
이 름 최만홍 2005-10-19
남 긴 글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불교에 관심이 많습니다.

불교에 관한 좋은 정보와 자료가 가득하군요.

자주 와서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건강하시구요.
 
글수정,삭제No. 167
이 름 jkr 2005-10-13
남 긴 글 과거에 아주 플레쉬블하게 읽었던 일지스님의
"감추어진 불교이야기"가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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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와 대승비불설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치열한 이원론을 바탕으로 구원을 모색했던 마니교는 소멸되어버린 고대 종교다. 마니케우스(215~276)에 의해 창시된 마니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모태로 성립된 종교로서 서방에서는 기독교, 동방에서는 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차용하여 10세기 이후까지 존속했다.

유명한 교부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도 이 마니교의 신자였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독교의 경쟁 상대였으나 4, 5세기경 기독교 측의 냉혹한 박해로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를 통해 전해진 동방의 마니교는, -불교의 옷을 입고 불교를 가장하긴 했지만- 중세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불교의 옷을 입은 이 고대종교의 전모는 1900년 돈황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해서 밝혀진다.
즉 영국의 스타인이 수집한 문서 2659a번 <마니교하부찬(摩尼敎下部讚)>과 3969번 <마니광불교법의략(摩尼光佛敎法儀略)> 등이 불교화된 마니교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특히 731년 당 현종의 명으로 마니교의 경전, 교리, 사원과 출가제도에 관해서 기록된 <마니광불교법의략>은 만약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들이 읽으면 마치 불교경전을 읽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완전히 불교화되어 있다. 마니교도들은 이미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옷을 빌려 입고 자신들의 종교를 포교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옷을 입고 불교를 가장한 마니교는 마침내 불교교단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통전(通典)> 732년 7월에 조에 실린 한 조칙에서는 “본래 사견(邪見)인 마니교가 불교를 사칭하여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으므로 마땅히 엄하게 금단시켜야 한다. 만약 서쪽에서 온 외국인들이 이미 자신들의 종교를 따르고 있는 경우에는 죄를 묻지 말라”고 적고 있다. 이후 마니교는 755~763년간 폭발한 당대 중국의 대반란,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위구루 군대의 힘을 빌려 난을 진압한 당 왕실의 지지에 힘입어 중국 각지에 마니교의 사원, 즉 마니사가 세워진다. 그러나 당 무종에 의한 회창연간(842~845)의 불교탄압 때 마니교 또한 외래종교라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소멸되기에 이른다. 불교화된 마니교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마니교 문서들이 현재 불교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신수대장경>의 제54권 외교부(外敎部)에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문서들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불교가 아우르는 영역은 큰 것임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또 한 가지는 불교화된 마니교의 흔적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현재 지역과 절에 따라서는 <천수경>의 “환희장마니보적불, 제보당마니승광불….”과 같은 일련의 마니불계통의 불명은 독송하지 않는다. 옛부터 스님들은 이미 마니불 계통의 불명이 바로 불교화된 마니교의 흔적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니교의 전적은 대부분 산실되어 버렸지만 1945년 이집트에서 마니 자신이 쓴 글과 마니교 성전이 발견되었다. 마니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23세경 인도를 여행하며 가르침을 설했고 후에 페르시아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불교를 알고 있었으며 붓다, 예수, 조로아스터를 자신의 선구자로 여겼다. 마니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마니는 기독교도를 비난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도를 비난한다. 즉 “불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고 있지 않다. 스승으로부터 들은 가르침의 일부를 문자로 기록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마니는 자신의 생존 기간 동안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가르침의 일부만을 전하여 제멋대로 해석할 것을 염려하여 유서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마니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에는 대승불교가 흥기하여 대승불교도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석존의 진정한 가르침이며 소승불교는 석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저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소승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비불설(非佛說)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마니는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비불설이라는 논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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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품왕생의 유래



16관법과 구품왕생(九品往生)을 설하는 <관무량수경>은 <무량수경>, <아미타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이라고 불리우며 <무량수경>, <아미타경>과는 달리 범본이 현존하지 않는다.
<관무량수관경>은 유송(劉宋, 420-479)의 역경삼장 강량야사(Kalyasas, 383?-442?)의 한역(漢譯)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본경의 원전은 한역(漢譯)과 위그르(Uighur)어역이 있을 뿐이다. 위글어역 <관무량수경>은 일본의 오타니탐험대가 트루판(高昌, 신강위그르자치구) 부근에서 발견한 단편 1장이다. 이 문건의 연구와 해독에 의하면 <관무량수경> 제10 관음관의 한 부분에 상당하는 내용으로 관세음보살의 당음(唐音)을 위글어로 음사한 Kuan-si-im-Pusar이라는 단어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역<관무량수경>의 위그루어 중역으로 알려져 있다. 즉 위글어 <관무량수경>단편조차도 범본이 아닌 한역 경전을 원본삼은 번역인 것이다.
이 경의 서장은 마가다의 국왕 빈비사라의 아들 아사세가 악우 데바닷타의 유혹에 빠져 왕위를 찬탈하고자 부왕 빈비사라를 일곱겹의 감옥에 감금하는 반역으로 시작된다.
유폐된 위제희는 근심과 슬픔으로 초췌하게 되어 멀리 기사굴산에 있는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구원을 호소하자 세존은 목건련과 아난을 보내어 위제희를 기사굴산으로 데려온다.
그때 세존은 미간에서 금색광명을 발하여 시방무량세계를 두루비추고 다시 불정(佛頂)으로 거두어들여 머물게 하자 금색의 대(臺)로 변하여 수미산과 같이 되며 시방제불의 정묘국토(淨妙國土)가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위제희로 하여금 보게 하였다. 그러나 위제희는 “저는 지금 극락세계의 아미타불 계신 곳에 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세존은 서방극락세계에 나고자하는 자는 삼세제불의 정업정인(淨業正因)인 세가지 복업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일상관(日想觀),수상관(水想觀), 보지관(寶地觀), 보수관(寶樹觀), 보지관(寶池觀). 보루관(寶樓觀), 화좌관(華座觀), 상상상(像想觀),진신관(眞身觀), 관음관(觀音觀), 세지관( 勢至觀), 보관(普觀), 잡상관(雜想觀)의 13정선관(定善觀)과 상배관(上輩觀), 중배관(中輩觀), 하배관(下輩觀)의 3산선관(散善觀)을 설한다. 이를 모두 합하여 <觀無量壽經>의 16관행, 16관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산선3관에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품(品, 根機)과 생(生, 往生)을 상배 ?중배 ?하배로 나누고 다시 각각 상중하 3품으로 구분하는 구품왕생(九品往生: 上品上生, 上品中生, 上品下生, 中品上生, 中品中生, 中品下生, 下品上生, 下品中生, 下品下生)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품상생은 대승의 가르침을 닦는 범부로서 지성심(至誠心) 심심(深心) 회향발원심(廻向發願心)을 발하여 용맹정진하는 대승상선의 범부이다. 상품중생은 대승차선의 범부, 상품하생은 대승하선의 범부이다.
중배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소승을 닦는 범부로서 3복 가운데 주로 계복(戒福)을 닦으며 중품상생과 중품하생이 여기에 해당된다. 후자는 불교이외의 선을 닦는 사람으로서 삼복 가운데 주로 세간적 복을 실천하며 하품하생에 해당한다.
본경에서는 이와같은 삼배구품관을 기준으로 행자의 생전인행과 왕생관법, 왕생후과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관무량수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구품왕생사상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는 불교의 영향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범본이 현존하는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도 구품왕생의 사상을 암시하는 내용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전의 연구에 공력을 쌓은 전문가들은 본경의 구품왕생은 <漢書> ‘古今人表’에 보이는 인물의 9등급 분류(品第) 및 조위(曹魏)시대에 처음 사용된 관리등용법인 ‘구품관인지법(九品官人之法)’의 제도를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구품왕생단이 고대중국의 관품제도를 반영한다는 주장은 현재 유력한 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9는 서방 금에 해당하는 숫자로서 궁극의 숫자이다. 9는 3의 세곱수로서 3배확대의 원리(천지인)에 따라 완성의 원리를 표현한다. <주역산경(周易算經)>에서는 九九八十一이 萬이라고하며 즉 모든 것의 끝, 충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재생의 숫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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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j k r 2005-10-13
남 긴 글 태극의 원리가 지배하는 음양의 세계에서는 하늘의 천사도 한차원에 고정적으로
눌러 있는것이 아니라 선신이 악신으로 악신이 선신으로 제각기 차원이동 해서 그렇습니다..
서구 종교에 신화적 요소로 남아 있는 천사의 반역이야기,
이쪽종교의 선신이 저쪽 종교의 악마로 되는것,
선신과 악신의 우주적 규모의 싸움, 악신의 패배와 추락같은 이야기는

역시 불전에 있는 아득한 과거 데바와 아수라의 싸움이야기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담으로 예수 전기인 공관복음서에도 서로서로 내용이 다르고 어떤것은 상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일한 체계로 알고 있는 기독교도 예수의 순수한 가르침과 함께 기존의 헤브라이즘의 전통에 오르페우스교 마니교
배화교(조로아스터교)
신플라톤같은 희랍적 세계관 페르시아를 통해 알게 모르게 유입된 불교나 쟈이니즘의 영향,영지주의등등 다양한 시대와 사고의 습합물로 오늘에 이르게 된것일 뿐입니다..

마치 인간의 오온이 가화합이듯이...

그러니 제도화된 종교의 가르침이 그대로 성인의 가르침과 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당한 왜곡과 변질을 거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습합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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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하는 새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글수정,삭제No. 165
이 름 김성철 2005-10-11
남 긴 글 강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저는 그 동안 <중관학입문>이라는 책을 만드느라
서울 사당동 연구실에 콕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완성했습니다.

중관학입문이 완성되면 고구려의 승랑 스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책을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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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기원에 대한 학설을 말씀하셨는데, 모두 서구 학자들의 분별적 이론일 뿐입니다.

물론 불경에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보이긴 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자인인 '아후라 마즈다'가 불교의 육도윤회설에서 말하는 '아수라'입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가 최고신이지만, 불교를 포함한 인도종교에서는 '악신(惡神)'인 아수라가 됩니다.

이와 반대로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천신인 데와(Deva)를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신'으로 간주합니다.

상대방의 절대자를 서로 악마라고 부르는 겁니다.

기독교의 말세론과 구원론 등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조로아스터교와 무관합니다.

강교수님 질문은 크게 보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과 관계됩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방불교권에서는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대승불전에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초기불전에서는 거론되지 않던 보살들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래서 대승불전은 불교문학일 뿐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대해 어떤 일본학자는 "그러면 초기불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가?"라고 되묻습니다.
초기불전도 불멸 후 500년이 지나 문자로 기록되기에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벨기에의 가톨릭 주교였으며 저명한 불교학자였던 고(故) 에띠엔느 라모뜨 교수는 이런 대승보살과 대승불전은 불교수행자가 삼매의 상태에서 만난 영적인 존재들과 그들이 구술한 가르침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해명들에 근거할 때 대승불교와 대승보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1. 그 어떤 종교의 신격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할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의 예수도 '예수보살'로서 불교내의 존격으로 수용될 수 있다.

2. 현대에도 티베트 불교인들은 밀교 수행 중에 영적인 세계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불보살들을 만나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친견한 불보살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등이다. 이는 라모뜨 교수의 해석과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164
이 름 강병균 2005-10-11
남 긴 글 김교수님

안식년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어떤 학자들은 아미타불 신앙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교수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시불교 내지는 초기불교에 아미타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시불교 내지는 초기불교에 관세음보살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163
이 름 권민석 2005-10-03
전자우편 muchikan@hotmail.com
남 긴 글 교수님의 동영상 강의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명쾌하고, 세심한 설명에 제가 가진 궁금함을 푸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 꼭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앞으로도 많은 글과 자료를 올려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 사이트에 온 것과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참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수정,삭제No. 162
이 름 도인... 2005-09-17
남 긴 글 비밀번호가 맞지 않아서 아랫글 수정이 안되어 한글자 더 올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인간이 부처가 되지 않은 이상에는
결코 저 서구신학의 神(창조주)가 될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창조한 업業에는 여지없이 보報가 특히나 악보가 따른다는게 인간의 유한성 불완전성을 나타내주는 증표가 아닌가 합니다..

보를 만들지 않을려면 작은 창조주인 스스로의 마음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지 생각해볼렵니다...
 
글수정,삭제No. 161
이 름 도인... 2005-09-17
남 긴 글 빅뱅이론은 어디까지나 호킹의 학설이지
전문적인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오히려 문제점이 많은 이론으로 통합니다..

제법 기독교의 창조설을 뒷받침해줄정도로 유사해
보이니까 조금더 힘을 부여받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입니다...(아직까지 서구에서는 기독교가 그들의 주된 이데올로기니까..)

인간과(피조물) 신(창조자)의 존재론적 단절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신학에서야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하느님이지만 범아일여, 불성과 까르마를 이야기하는 인도사상 혹은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우리 중생들의
업입니다...고로 우리 중생들의 마음이 곧 창조주인 셈입니다..

고로 불교에서는 이 우주가(지구) 창조된것은 다른 별에서
지은 중생들의 업력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미국같은데서는 이제 예수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흑인촌에서야 아직 열광적으로 통하지만
조금 배운 인텔리겐차들에게는 더이상 그런 비논리적이고 유치한 이야기는 별로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대형아파트촌에서는 여지없이 바로옆에 큰 교회가 생기고
별 무리없이 그런 유치한 논리가 빈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잘 통합니다...

제 생각에 이런 흐름은 아마도 개화기부터 과학기술과
함께 들이닥친 자본주의의 힘을 등에 업은 세력과
뭔가 새로운 것, 바깥에서 들어온 것은 참신하고 수승한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변경민족의 지형학적 성격에 의해서
아직까지 그 영향력과 힘을 유지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불교가 시대적 흐름에 맞는 자기정화와 참신한 발전을 보여주지 못햇던 것도 한 이유겠지만요...


아뭏든 길게 잡아 추후 100년후에는 빈틈없이 정밀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불교라는 위대한 종교에게 (원효같은 위대한 불교사상가가 이 지국촌 시대에 그 사이 나온다면 훨씬더 단축)
기독교는 여지없이 허물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대속론같은 유치한 주장을 계속해 나간다면.)

한가위는 어쩌면 1년중 씨뿌린것을 거두는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

우리 마음밭에 올해는 무엇을 새롭게 심었는지 얼마나 열매 맺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는 명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글수정,삭제No. 160
이 름 김성철 2005-09-17
남 긴 글 아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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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만년의 회상'이란 자서전에서 '종교와 과학'에 대해 논하면서, 불교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요소가 많지만, 불교는 과학의 발달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우주종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서구인들이 전 세계 문명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기에 첨예한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담론에서 서구의 종교인 기독교나 서구에서 시작된 학문인 자연과학만을 소재로 삼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유럽은 지구의 문명권 가운데 가장 열등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대적인 살륙과 약탈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얻어진 엄청난 재화가 유럽에 유입되면서, 과학과 예술과 학문 등이 발달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뉴턴(1642~1727)의 물리학과 칸트(1724~1804)의 철학과 모차르트(1756~1791)의 음악에는 유럽인들에 의해 말살당한 남북 아메리카인디언의 피가 배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학문과 예술 모두 강탈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된 재화에 토대를 둡니다.
돈이 넘쳐 나니까 놀고 먹으며 머리만 굴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홈페이지 문서자료에 올려진 최근의 제 논문 <불교대학졸업생의 사회진출 현황과 개선방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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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교를 신행하고 포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는 그 어떤 학문이나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스티븐 호킹 등이 주장하는 '빅뱅이론'은 허구이기 쉽습니다.
별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니, 별을 이루는 가스에 의해 흡수된 빛의 파장치가 예상치보다 길어지기에, 다시 말해 적색 스펙트럼 쪽으로 치우치며, 모든 별빛에서 이런 현상이 관찰되기에, 별들이 지구에서 점점 멀리 달아나고 있다고 해석하게 된 것이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며, 이를 거꾸로 소급해 보니 먼 옛날 언젠가 최초의 한 점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어 '빅뱅'이론이 탄생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별들의 멀어지는 속도가 지구에서 떨어진 거리에 정확하게 정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주에 떠 있는 별들의 위치와 질량이 모두 다르기에, 다시 말해 불규칙하기에 만일 태초의 폭발이 있었다면 별들의 멀어지는 속도 역시 불규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정확히 정비례합니다.
그렇다면 폭발이 아니라 '빛의 노화'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멀리서 빛이 오다가 지쳐서 에너지를 상실하여 스펙트럼이 '에너지가 적은 긴 파장의 빛인 적색'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X-선이 전자와 부딪히면 에너지를 상실합니다.
이를 '콤프턴 효과'라고 부릅니다.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파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주 저 멀리서 오는 별빛이 지구로 오는 도중 우주에 산재한 전자와 부딪혀서 에너지를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적색편위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빅뱅이론' 보다 쉽고 명쾌한 해석입니다.
빅뱅 당시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태초의 '복사파'에 대해서도 달리 해석할 여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또 여기서 한 가지 더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주에 산재한 전자의 밀도가 균일하다.'는 점입니다.
어느 방향이나 모두 별의 거리에 정비례하여 적색편위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호킹의 책을 보면, 불교를 포함한 동양사상과 물리학을 비교하는 일에 무척 거부감을 표시하는 글이 발견되며 은연중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암시하는 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호킹의 빅뱅이론은 물리학을 가장한 신학입니다.

제가 물리학도가 아니면서 주제넘은 글을 쓴 것 같지만, 아마추어이기에 만용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재미삼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소립자 물리학이나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데 나중에 물리학과 불교를 비교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논문으로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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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우주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본 홈페이지에 올려진 '불교TV강의' 중 초기불교의 우주론과 삼계설1, 2, 3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빅뱅이론이 아니라 맥동설이 맞습니다. 성주괴공설에서 가르치듯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맥동)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우주입니다. 그리고 수축할 때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색계 제2선천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게 되고, 지옥이나 인간계가 모두 파괴되는 때입니다. 모두 천사가 될 때, 우주는 파괴됩니다.
 
글수정,삭제No. 159
이 름 원명 2005-09-16
전자우편 bluelotusam@hanmail.net
남 긴 글 안녕하세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어제 kbs 책을 말하다 라는 프로에서 우주에 대해 다루

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분히 유물론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에서 이야기기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불교의

우주관은 현대과학과 어떻게 일치하고 충돌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빅뱅이론

도 신학의 태초이론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요.(초끈 이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됬음)

불교이론는 현대과학이 더 발전할수록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건가요? 유물론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는 과

학의 발전은 불교사상에 또다른 위협을 가져오는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글수정,삭제No. 158
이 름 신오유 2005-09-11
남 긴 글 좋은 책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가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57
이 름 김성철 2005-09-04
남 긴 글 드디어 <보리도차제론> 편역본이 발간되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보리도차제론>은 1402년 쫑카빠 스님에 의해 저술된 이후 지금까지

티벳인들을 강력하게 선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불교인들로 길러 온 위대한 신행지침서입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요점을 뽑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책인데,

불교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읽을 경우

누구나 자신의 심성에 변화가 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초적 심성 훈련체계가 부족한

우리 불교계에 보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티벳 불교 열풍이 일어나게 만든 근원은

바로 <보리도차제론>에서 가르치는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에 있습니다.

작년에 부산 광성사 한국티벳센터에 계신

초펠 스님께서 <람림>이라는 이름으로

<보리도차제론> 시험본을 출간하셨는데,

그 내용을 대폭 개편한 수정본입니다.

1998년에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순서>라는 이름으로

<보리도차제론> 편역본이 출판되었지만

작은 문고판이라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편역본은 476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입니다.

제목은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으로

되어 있고, 부제는 <람림>입니다.

'도서출판 하늘호수' 출판사에서 발간하였는데

일반서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격은 18000원이고, 출판사 주소와 전화번호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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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남구 대연3동 314-19 경성대학교 예술관 3-326

전화번호: 051)620-4919

 
글수정,삭제No. 156
이 름 김성철 2005-08-27
남 긴 글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너무 반가왔습니다.

학예연구사라는 명함을 보고는 더 기뻤습니다.

재학 중 성실하고, 진지하게 공부하던 모습 떠올리면서,

이선희 양 좋은 직장 취직한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대학 다니던 때와 같이 깊은 신심을 갖고 성실하게 생활할 경우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연구년으로 내년 8월까지 서울에 있을 예정입니다.

집 주소는 메일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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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피에 들어오는 분들 중 티베트불화전시회를 보고 싶은 분들은, 9월 7일 이후 서울 비원 옆(왼쪽 골목 100m)에 있는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을 방문해 보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buddhistmuseum.co.kr/
 
글수정,삭제No. 155
이 름 이선희 2005-08-27
전자우편 ggorro@honmail.net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안녕하세요. 불교미술과 졸업한 이선희라고 합니다. 기억 하시죠?
지난번 불교미술박물관에서 우연히 교수님 뵙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번 저희 박물관에서 9월 7일 부터 티베트 불화전시회를 열게되어 교수님께 도록을 보내드리고자 하는데 수령 하실 수 있는 주소를 몰라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글 보시면 제 메일로 알려주시면 빠른 시일내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154
이 름 김성철 2005-08-21
남 긴 글 학감스님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강의 첫 시간에 드린 얘기지만,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고 대륙으로 교통로가 열리며 중국에 불교가 크게 일어날 때
<불국사>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국사>와 경주 문화재의 스케일로 보아 그렇게 짐작됩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불교문화재는 그 규모가 작은데,
석굴암, 불국사, 감은사 탑 등등의 스케일은 대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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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연을 계기로 불국사 강원과 경주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 불교문화대학 학생들도 경주에서 공부한다는 점에 대해 더욱 자긍심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불국사 강원에서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경주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님들도 힘이 되는 한 무엇이든 도와드릴 것입니다.

기회가 될 때 다시 뵙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153
이 름 학감스님 2005-08-21
전자우편 tansung10@hanmail.net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여름 더위에 강의하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함께 공양 못해 죄송하구요..
나중 기회되면 서봉스님과함께
공양했으면 합니다..
환절기 건강하시길...
 
글수정,삭제No. 152
이 름 김성철 2005-08-18
남 긴 글 강교수님
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덥습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겠지요.

현대불교신문사에서 후원하고 동화사에서 주최한
계율 토론 법회에 참석하셨나 봅니다.
동화사 주지스님께서, 화엄, 선에 이어 올해에는 계율 법회를 마련하셨더군요.

최근 우리 불교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학계든, 승가든, 재가든 부글부글 들끓습니다.
그 어느 학회보다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불교학회 학술대회, 줄을 서는 선방, 불교NGO의 활발할 활동,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불교사회복지기관, 국내 3대종교 중 가장 높은 신도수 증가율(최근 5년 동안, 가톨릭 0.7%, 개신교 0.9%, 불교 3.2% 증가) 등등...
불교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잠자던 사자가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잠을 깨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천수경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교수님 지적과 같이 화탕고갈, 지옥소멸로 고쳐서 강의해야 하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주변의 불교학자들에게도 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151
이 름 강병균 2005-08-18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무더운 여름에 잘 지내시는지요?

제가 대구 동화사에 들렸다가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예전에 질문한 천수경중에 "화탕소멸 지옥고갈" 있지 않읍니까? 구한말에 어느 분이(그분 성함을 들었는데 기억이 안납니다) 불교예식문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오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잘못된대로 쓰다보니 굳어져 고치기 힘들고 그래서 잘못된대로 남게 되었답니다.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150
이 름 김성철 2005-08-14
남 긴 글 관휴 스님
람림 교정본이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그 동안 손꼽아 기다렸는데...
수고스러우실 텐데, 람림을 보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연구년으로 내년 8월까지 서울에 있을 예정이라서, 제 집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집 주소를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
본 홈피에 들어오는 분들을 위해 람림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람림>은 위대한 불전으로 티베트 쫑카빠 스님(1357-1419 C.E.)의 저술입니다.

원 제목은 <쟝춥 람림 첸모>로 <대보리도차제론>, 또는 <보리도차제광론>이라고 한역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 순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책으로 읽는 사람 누구나 그 심성이 개조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의 경우 <바이블>이라는 책 한 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 방대해서, 불교신행의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의 불교도들에 대해, 기독교의 <바이블>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람림>입니다.

람림에서는 그 동안 전승되어 온 대승과 소승의 모든 가르침을 일목요연한 신행체계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람림을 읽는 것 자체가 그대로 불교수행이 됩니다. 그대로 심성훈련이 됩니다.

저는 부처님 이후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은 <용수보살>이고, 자비심이 가장 컸던 분은 람림의 저자인 <쫑카빠 스님>이라고 강의합니다.

람림을 읽는 이 모두의 심성이 개조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주변 분들이 불교신행지침서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람림을 권해보시기 바랍니다.

람림(Lam rim)에서 람은 '길'로 번역되고, 림은 '차제, 순서, 사다리'로 번역됩니다.

본 홈피 문서자료 페이지에 실린 <김성철 논문> 가운데, <티베트 불교의 수행체계와 보살도>라는 논문에 람림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본 홈피 <불교TV 동영상 강의> 중 제48회 <보리도차제론> 강의에서 람림에 대해 설명합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한국티벳센터>를 치면, 초펠스님이 계시는 부산 광성사 홈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글수정,삭제No. 149
이 름 관휴 2005-08-14
전자우편 yurigwang@hanmail.net
남 긴 글 교수님! 더운 여름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건강하시죠?
저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1학년 관휴라는 스님입니다. 교수님 강의 아주 재미있게 듣고 배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초펠스님의 람림책이 다시 수정판이 나왔는데요 초펠스님께서 한국어가 미흡하다보니 틀린것이 많아서 다시 교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나온 책들은 소각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보내 드리고 싶은데 주소를 몰라서요 알려주시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초펠스님은 오늘 오전에 인도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ㅡ.ㅡ
오늘 말복이라고 하던데 더위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데 건강 꼭 챙기시구요 하루 빨리 뵙고 싶네요.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_()_
 
글수정,삭제No. 148
이 름 k 2005-08-11
남 긴 글 방금 밑의 글을 읽고 생각난것을 잠깐 적고 가렵니다.
선과악에 대한 것인데요.
보통 유일신이나 어떠한 신을 가지고 있는 유신(有神)종교의 경우 어떠한 행위에 대한 판단자가 존재합니다. 그게 신이죠. 제가 알고있기론 불교는 신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카르마에 대한 결과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선악을 구분 짓는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리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하여 그것을 꼭 악(惡)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처음에 제가 불선(不善)이란 말을 알았을때 저는 '선이 아닌것' 이라고 해석 했습니다.
근데 대부분 제가 아는 사람음 불선=악 이라고 생각 하더라구요. 선하지 않은 것 뿐이지 그것이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책에서 본것인데 '자살하면 안락을 얻지 않습니까?'하는 질문에 티벳스님들은 이렇게 설명한다고 합니다. "죽으면 안락해지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 카르마를 이루고있던 여러 종류의 매듭이 풀리지요. 그래서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누구나 안락정토를 볼 수 있는 매우 멋진 체험을 하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 확실히 안락해 집니다. 하지만 말이죠...명가(冥加)에 좋지 않습니다. 명가는 생전에 쌓아둔 선의 창고와 같은 것인데 이것이 사망 직후에 활동을 시작해서 사후의 의식을 거쳐가는 궤도를 결정합니다. 즉 사망 직후에는 누구나 극락의 상태를 엿보게 되지만, 그짧은 시간에 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곧바로 다음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궤도로 들어가 버립니다."
한마디로 자살은 죄악이 아니라 일종의 손해보는 개념인겁니다. 그런 손해를 보는 짓을 할필요가 없다는 거죠.
물론 환생이 존재 한다는 존건 아래서 유효하지만 말이죠.
티벳 사자의 서 에서도 보면 인간이 살아있을 적의 카르마가 사후의 자신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아주 강렬하고 밝은 빛이 보이는데 일반인들은 이런 빛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여 피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과 은은한 빛을 따라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마의 영향에 의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의해 고통받고 무서워 결국 진리의 깨달음의 길로 가지못하고 자궁속으로 들어 간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죄를 묻는거 선악을 구분 짓는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저의 생각입니다. 주제 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사과 하겠습니다.. 짧은 소견으로 생각한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147
이 름 k 2005-08-11
남 긴 글 역시 많이 부족합니다.
좀 더 공부한 후에 교수님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뭔가 의문이 무지 많습니다만 글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언젠가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금강석을 쪼개듯 치열하게 진리에 매달려라...
 
글수정,삭제No. 146
이 름 김성철 2005-08-11
남 긴 글 질문의 요점은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1. (초기) 불교 경전에 행복이란 단어가 없는지? 리랙스로 번역되는 안락 만을 가르치는지?

2. 대승과 소승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3. 부처님은 윤회를 부정하셨는지?
-------------

답해 보겠습니다.

1. ''불교가 좋다'라는 책을 읽어보지 못해서 정확한 맥락을 알 수는 없지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불교에서는 행복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가 아닌 경우 불교에서도 삶의 2차적 목표로 행복을 지향합니다.

욕계의 6욕천이라는 하늘나라가 행복의 세계이고,

초선(初禪)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모두 행복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의 이치에 따라 그런 행복은 언젠가 사라지고 말기에 불교수행자는 행복을 궁극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2. 대승과 소승이라는 용어는 대승 측에서 만든 것입니다.

대승이 탄생하기 이전 시대의 불교인 부파불교, 아비달마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서 소승이라고 불렀던 것이기에,

피치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승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대승과 소승 모두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대승과 소승을 간단히 비교하면,

대승은 '부처님의 전생의 삶'을 닮으려는 불교이고

소승은 '부처님 현생의 삶'을 닮으려는 불교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에 기술된 보살의 삶을 닮아서

무량겁 이후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대승불교이고,

싯달타 태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수행한 후 성도하신 부처님의 현생의 삶을 닮으려는 것이 소승의 삶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재가자든 출가자든 모두 동참할 수 있는 큰 수레와 같은 불교이고,

소승은 출가자만이 중심에 놓이는 작은 수레와 같은 불교입니다.

제도하는 중생의 범위가 크고 지향하는 목표가 높기에 대승이라고 부르고

제도하는 중생의 범위가 좁고 지향하는 목표가 낮기에 소승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

3. 부처님 역시 윤회를 가르치십니다.

윤회가 부정되면 불교 전체가 부정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을 때 세 가지 신통력이 열렸다고 하는데

첫째는 숙명통이고,

둘째는 천안통이고

셋째는 누진통입니다.

이를 삼명(三明)이라고 부릅니다.

삼명 가운데 숙명통과 천안통은 윤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숙명통은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신통력이고,

천안통은 다른 생명체의 전생을 모두 알고, 내생을 모두 예측하는 능력입니다.

숙명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인과응보의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자각하게되고,

천안통을 통해서 인과응보와 연기의 법칙이 다른 생명체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보편법칙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편법칙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누진통을 얻습니다.

현대불교학은 서구에서 발생한 인문학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불교의 신비한 교리들은 모두 잘라버린 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만을 추출하여 불교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만일 윤회를 부정한다면,

초기불전의 2/3 이상이 모두 폐기되어야 합니다.

윤회를 부정하면 모든 불교 수행은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이 지향하는 열반, 해탈이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서구불교학자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문학적 호기심으로 불교를 연구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앙과 수행의 불교학이 새롭게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불교학을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이라고 부릅니다.
-----------
저는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지금은 불교만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의사라는 직업은 치과의사보다는 불교를 공부하기에 좋은 직업입니다.
한의학 공부 열심히 하면서, 불교공부도 병행하여 앞으로 좋은 역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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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145
이 름 k 2005-08-11
남 긴 글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국대 학생은 아니지만 불교의 의문점이있어 마땅히 자문을 구할곳이 없어 이곳에 글을 올립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저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나서 누구나 그렇듯이 자연히 절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릴때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같은 것을 생각하기 좋아했기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 심리학 등등 여러 책을 접하였습니다. 물리학을 할려고 하였으나 현대과학의 한계에 실망하였고, 곰곰히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히브리성경 신약 모두 보아도 사랑하라 봉사하라 맘에 와닫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접한것이 사성제와 팔정도 였습니다. 가장 기초되는 것이긴 하지만 석가가 죽을때까지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여 더욱 끌렸습니다.
거기서 나의 길을 찾았습니다. 사성제의 12법륜을 보며 문득 부처님은 의사와 같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고통은 인지 하고 나아질수있음을 인지하고 그방법을 찾아서 고통을 없앤다... 그 과정을 서포터 할 수 있는 것이 의사란 직업이었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린다고 말씀하시는 의사분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무엇이건데 생사여탈권까지 가지고 있겠습니까? 티벳 사자의 서에서 보았듯이 의사는 오히려 환자의 죽음의 과정을 편안하게 해주는게 의사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의과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여러책을 읽다가 '불교가 좋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종교학자 나카지와 신이치와 일본 임상심리학의 거장 가와이 하야호의 문답집 입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중 하나가 바로
불교 경전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불교경전은 팔리어 경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이 적절한 단어가 없어 happiness라는 단어을 선택한것이라는 건데요. 여기선 행복보다는 '안락' '안심(安心'이 라고 하더군요 영어로는 relax가 더 가깝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가지더 제가요즘 혼란을 격고 있습니다.
대승 소승 근본 불교에 관한것입니다.
왠지 대승과 소승은 나쁘다고 할수없지만 뭔가가 와전된느낌이 듭니다.
부처는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 불교는 윤회를 당연시 거론하지요.
정말 혼란 스럽습니다.
맘 같아서는 팔리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제가 직접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정신없지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럼 교수님의 견해 기다리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144
이 름 김성철 2005-08-10
남 긴 글 질문하신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1. 어떤 업이 과보를 초래하는지?
2. 부처님도 업을 짓는지?
3.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지?

각각에 대해 답해 보겠습니다.

1.
나에게 인식된 업은 과보를 초래하지만 나에게 인식되지 않은 업은 과보를 초래하지 않습니다.
불전에서는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 악업을 지은 경우보다, 잘못된 일인 줄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가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일반 상식과는 좀 다릅니다.
잘못된 일인 줄 모르는 사람의 경우 구제불능이기에 그 과보가 더 크고, 잘못된 일인 줄 아는 사람의 경우 개과천선할 수 있기에 그 과보가 적습니다.

'알고 지은 악업보다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가 더 크다'고 할 때 말하는 '앎'은 가치론적 앎을 의미하고,
'알고 지은 악업의 과보는 받지만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는 받지 않는다'고 할 때 말하는 '앎'은 인식론적 앎을 의미합니다.

2. 아라한이나 부처님의 경우 전생 업에 대한 과보는 받지만 그것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른 후 현생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45년 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선언이 가능한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말씀도 하시고 행동도 하시지만(구업과 신업), 부처님 당신이 자신을 볼 때는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행동을 해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선악의 기준은, 5계나 10선계와 같은 계목입니다.
계를 어긴 것은 악업이고, 계를 지킨 것은 선업입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악구, 양설, 기어, 탐욕, 진에, 사견을 짓지 말라는 것이 십선계인데, 이를 저지른 것은 악업이고, 이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선업입니다.
그래서 십선계를 십백업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글수정,삭제No. 143
이 름 원명 2005-08-10
남 긴 글
더운 여름 한철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업에 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십습니다.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업은 의도적이고, 선악을 분

별하는, 윤리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도적이라는 것은 어느범주까지 포함하는 것

입니까? 가령 저는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업력에

끄달려 tv를 켜고, 간식에 손이 가고, 메일을 확인합

니다.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한 혹은 악한 행위

를 하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인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떠한 행위라도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다만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과보를

초래할 지 알고 악업을 줄이고 선업만을 짓는다고 생각

합니다. 업에 의해 형성된 몸이 있는 한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악, 윤리의 기준은 어떻게 정할 수 있는 지

궁금합니다.

 
글수정,삭제No. 142
이 름 신오유 2005-08-08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의 유식무경/유경무식/경식구망의 의미를 잘 읽고 이해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
풍경과 인식이 함께 무너지는 공성과 연기를 매일 명상하여 분별과 의심과 후회와 성냄과 죽음과 삶에서 벗어나는 결국에는 해탈하는 즐거움을 향하겠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십시요.......
 
글수정,삭제No. 141
이 름 김성철 2005-08-06
남 긴 글 유식의 교리는 복잡다단합니다.
학파가 다양하고 교리가 다양합니다.

앞의 질문이 짧아서, 질문의 취지를 헛짚어, 질문한 분의 기대와 다른 답을 올린 것 같습니다.
경식구민의 교리를 모르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

그런데 경식구민(境識俱泯)의 이치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유경유식 -> 유식무경(또는 무경유식) -> 경식구민'으로 이어지는 조망의 향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사물이 보일 때, 안식이 생기는데 이 때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삼자에 선(線)이 그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에 대해 물질이라느니, 마음이라느니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에 대해 마음이라고 불러도 되고 다 물질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기(氣)라고 불러도 되고, 풍경이라고 불러도 되고, 내 망막의 살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식(識) 일원론이든, 유물론이든, 기(氣) 일원론이든 모두 마찬가지로 일원론일 뿐입니다.

경식구민, 또는 경식구망의 가르침이 시사하듯이, 더 높은 조망에서는 일원론이랄 것도 없습니다.

-----------

지금 올린 질문들 모두에 대해 본 게시판을 통해 속 시원하게 모두 답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유식학을 혼자 연구하시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식학에서 말하는 '형상(아까라)'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유식학파는 유형상유식파와 무형상유식파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식학 개론서를 보면, 유형상이나 무형상에 대한 설명이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有)형상유식을 동(同)형상유식이라고 번역하고,
무(無)형상유식을 이(離)형상유식이라고 번역하면, 이 두 가지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형상유식이란, 외계 사물의 형상이 그대로(同) 우리의 식과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무형상유식이란, 외계 사물의 형상과 별개로(離) 우리의 식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제가 소개한 구유식에서 무형상유식을 주장하고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에서 유형상유식을 주장합니다.

<종은> 님께서 올린 글을 보면 '유가행파는 현실경험세계에서 인식의 대상은 그 대상의 형상을 띤 식 바로 그것이며 그 형상은 외계사물이 투사한것이 아니라 식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만든 표상이며,외적인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써 있는데..'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유식의 가르침 가운데 유형상유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유식의 가르침이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
유식의 가르침은 언어와 분별과 개념을 축조해 가면 구성한 것이기에, 어떤 입장에서 설명해도 교리의 내적모순에 대한 의혹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개념과 생각이 무너지는 공성을 파악할 때만 모든 의심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연기 공의 가르침을 희론적멸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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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오형근 박사님,
경주 동국대 이만 교수님,
서울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이신 묘주스님,
서울 동국대 인도철학과 강사인 김성철씨(저와 동명이인입니다) 등이 유식학을 전공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께 문의하면 보다 전문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글수정,삭제No. 140
이 름 종은 2005-08-06
남 긴 글 유식무경이 결국에는 경식구민의 중도진리를 말하기 위한 것인줄은 알지만 유식무경이라는 말자체가 그대로 진제차원의 조망은 아니기에 어려움이 있읍니다.
유식무경은 현실경험세계를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보려는
속제차원의 조망이고.....현실경험세계속에서 유식무경을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오위법중 색법을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움이고, 유경무식이라 하더라도 현실경험세계를 파악할때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는데...마찬가지로 오위법중 심왕법과 심소법,무위법을 어떻게 유물론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되는지 모르겠읍니다.
유가행파는 현실경험세계에서 인식의 대상은 그 대상의 형상을 띤 식 바로 그것이며 그 형상은 외계사물이 투사한것이 아니라 식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만든 표상이며,외적인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써 있는데....식의 상분을 견분이 인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식의 분화를 일으키게하는 매개가 될만한 어떤 사물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글수정,삭제No. 139
이 름 김성철 2005-08-05
남 긴 글 <종은> 님의 질문에 대해 답해보겠습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 문자 그대로 풀면 '오직 식만 존재할 뿐 대상세계는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취지는, '<객관인 대상>과 <주관인 의식>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분별을 타파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식'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식(識)일뿐'이라면 '식'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식 아닌 것'이 존재해야 '식'이 존재할 수 있는데, '식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에 대해 '식'이라고 이름붙일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식무경'보다 상위의 조망으로 '경식구망(境識俱妄)'을 말합니다.
객관대상이 있다거나 주관적인 의식이이 있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란 뜻입니다.

유식무경이라는 말의 취지가 모든 것을 마음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대상의 이분법을 깨주기 위한 것이기에, 유식무경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유경무식'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오직 객관대상만 존재하고 주관적 의식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객관대상을 우리 앞에 나타나는 '풍경'이라고 명명한 후 엄밀히 조망하면, 모든 것은 '풍경'뿐이며, 마음은 없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풍경(風景), 나뭇잎이 흔들리는 풍경, 눈 앞의 컴퓨터 모습도 모두 풍경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내 의식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도 이런 풍경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불쑥 어제 먹었던 포도가 생각납니다.
창 밖에서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듯이, 내 의식에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모두가 풍경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직 풍경만 존재할 뿐 나는 없다'(有境無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식무경이라는 말이나 유경무식이라는 말이나 그 취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보면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폭류처럼 콸콸 흘러가는 현상의 흐름뿐입니다.






 
글수정,삭제No. 138
이 름 종은 2005-08-05
남 긴 글 유식무경이라는 말을 참 이해하기가 어렵읍니다...
일체가 표상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이해가 가는데..어떤 매개적인 표상이 되어 우리에게 그 실재가 알려지는 것같은
외적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경은 이해가 안됩니다....
가유로서 외부사물의 존재조차도 부정한는 것인지...그렇다면 근과경을 연하여 식이 생긴다는 가르침과 서로 모순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교수님의 명괘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137
이 름 강병균 2005-07-18
남 긴 글 아래 김성철교수님의 계정혜에 대한 글은 참 좋은 글입니다.
 
글수정,삭제No. 136
이 름 만불사 2005-07-18
홈페이지 http://영천 만불사에서 열리는 음악회 놀로오세요 ^ ^
남 긴 글 안데스 잉카음악과 국악이 산사에서 만나다.
영천 만불사에서는 7월 20일 오후 7시 제3회 매월 달맞이 산사음악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산사음악회에는 안데스 산맥의 잉카음악과 우리나라 국악이 만나 아리랑과 엘콘돌 파사 협연하니, 산사에서 만나는 전통음악의 향연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산사음악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 및 초대권은
www.manbulsa.org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35
이 름 김성철 2005-07-17
남 긴 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수행이든 그것이 불교라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수행체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계 중 색계의 경지에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 정, 혜> 수행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계> 수행을 철저히 할 경우 수행자는 욕계천의 정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선정> 수행 없이 <지계>만 닦을 경우 결코 색계천에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물론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을 철저히 닦은 수행자의 경우도 색계천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을 <사범주(四梵住)>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범천의 세계(색계 초선천) 이상에 태어나 살게 만드는 네 가지 수행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무량심 역시 초선, 2선, 3선, 4선의 색계선과 관계됩니다. 가부좌 틀고 앉아서 자관, 비관, 희관, 사관을 하는 것인데 희심에서 사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색계 제3선을 완성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청정도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계> 수행이 철저한 수행자, 다시 말해 ‘욕계를 벗어날 자격을 얻은 수행자’만이 참된 <선정> 수행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욕계 위에 있는 것이 색계이고 색계에서 깨달음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지계 수행이 없는 경우는 결코 색계선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그 겉모습만 가부좌 튼 수행자이고, 혹 그가 묘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다만 욕계의 <산정(散定: 산만한 삼매)>에서 얻어진 느낌일 뿐입니다.

색계선을 체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의 깨달음인 것은 아닙니다.
초선, 2선, 3선, 4선 등 색계선을 체득한 수행자는 죽은 후 색계천의 천신으로 살 뿐입니다.
아직 <지혜>는 열리지 않고 색계의 <선정>만 완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색계선의 토대 위에서 다시 수행하여 <지혜>를 닦아야 아라한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緣起)의 지혜’입니다.
이런 연기-공의 지혜가 열려야 수행자는 윤회의 세계, 즉 삼계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해탈, 열반을 하는 것입니다.
삼계의 탈출구는 바로 ‘색계’에 있습니다.

비유한다면, 항아리에 담긴 물에 달 그림자가 비칠 때, 물결이 출렁이면 달 그림자가 이지러집니다.
물이 잔잔해져야 달 그림자가 그대로 비칩니다.
이 때 물결이 잔잔해지는 것이 <선정>에 해당하고 달 그림자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것이 <지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물을 담고 있는 항아리는 <지계>에 해당합니다.
물이 잔잔해져야 달 그림자가 제대로 비치지만, 항아리가 깨지면 아예 물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항아리는 지계에 해당합니다.

<계, 정, 혜> 삼학은 복잡하거나 난해한 수행체계가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의 답을 알고자 알 때 ‘곰곰이 생각’합니다.
여기서 ‘곰곰이’는 정에 해당하고 ‘생각’ 혜에 해당합니다.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라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만 너무 심해지면 혜가 열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정이 너무 깊어지면 혜가 열리지 못합니다.
이런 정이 바로 삼계 중 무색계에 이르게 하는 정입니다.
비유한다면 항아리 속의 물이 잔잔해지다 못해 얼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어버리면 달 그림자가 아예 비치지 않습니다.

삼계의 탈출구가 바로 색계에 있기에 <계, 정, 혜> 삼학을 단계적으로 거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계>가 완성되어야 욕계의 정상으로 올라가 색계에 진입할 자격을 얻으며, <정>을 닦아야 색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닦아 온 <계>와 <정>의 토대 위에서 <혜>를 닦아야 비로소 색계에서 탈출하는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계>나 <정>을 별로 닦지 않고도 깨닫는 분이 있습니다.
전생에 많은 수행을 했기에 태어날 때부터 <계>와 <정>을 갖춘 사람의 경우 <혜>만 닦아도 금새 깨달음이 열릴 수 있습니다.
공자님 말씀하신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 다시 말해 ‘태어날 때부터 그 심성이 너무 착하고 집중력이 강한 사람’의 경우는 <혜>만 닦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전 인류 가운데 몇 명 안 될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간화선의 경우 <정>과 <혜>가 열리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 수행이 그 체계 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수행자가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을 중흥시키는 길은 <지계> 수행에 있을 것입니다.

지계 수행은 <자자>와 <포살> 의식과 <갈마>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계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규범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족계를 받아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이를 어길 때 참회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심성과 행동에 진정한 변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정기적으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어긴 계목(戒目)을 고백하고, 율장의 지침에 의거하여 그 죄업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 것, 이런 훈련을 수년 간 해야 비로소 지계가 완성됩니다.

율장의 규범 그대로를 따르지 못한다고 하면, 그 취지라도 되살려서 자자, 포살, 그리고 갈마를 복원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 불교수행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글수정,삭제No. 134
이 름 원명 2005-07-17
남 긴 글 안녕하세요??

아래 답변에 복행은 선업, 비복행은 악업, 부동행은

참선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방법이 제시될수 있겠

지만 욕계 6천까지, 거기서 색계 4선까지, 그리고 색계

4선에서 연기를 직관할 수 있을 때까지 단계별로

구체적인 수행법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계종에서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

에게도 간화선을 고잡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거든요.

간화선 수행은 기본 예비 수행이 갖춰져야 들어갈 수

있는 고급수행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째든 수행의

체계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정돼 자신의 수준과

역량에 맞는 단계를 선택해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보리도 차제론을 대안

으로 제시하셨는데 한국불교수행자에게 맞는 수행

체계는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요?
 
글수정,삭제No. 133
이 름 김성철 2005-07-14
남 긴 글 오랜만입니다.
강교수님
방학 잘 보내고 계시겠지요.

'색계에서 가능하다'고 너무 간단히 써서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경지인 초선(初禪), 제2선, 제3선, 제4선의 상태에서 불교의 깨달음이 열린다고 합니다.

색계천이나 무색계천의 경우 그곳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색계선이나 무색계정을 체득해야 한다고 합니다.

욕계의 천상이나 지옥은 그 업에 따라 수직 이동이 가능한데, 색계나 무색계는 수평이동하여 태어납니다.

12연기설의 '행'지분을 '福行, 非福行, 不動行'의 셋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동행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는 업입니다.
그 경지가 되어야 그 곳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래위로 이동함 없이(부동) 수평이동하기에 부동행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욕계의 천상이나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업인 '복행이나 비복행'은 동행(動行)입니다. 아래 위로 수직 이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색계에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말은 욕계인 이곳 인간계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색계선(禪)'의 경지에 올라야 그에 입각하여 연기의 지혜를 체득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간단히 표현하여 오해를 사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132
이 름 강병균 2005-07-14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무더운 여름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밑에 교수님이 쓰신 글중에 아라한이 되는 것은
색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스셨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 부처님의 제자 1250 제대아라한은 그럼 아라한이
아니란 말인지요? 지구는 분명 욕계가 아닙니까?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131
이 름 김성철 2005-07-11
남 긴 글 아라한이 되는 것은 색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색계는 선정과 지혜가 균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위로 올라가면 선정의 힘이 너무 강해져서 연기를 직관할 수 없고 더 밑의 세계는 분별의 힘이 너무 강해서 연기를 직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색계에 태어나도 연기의 지혜가 열리지 않으면 천신으로 살다가 다시 욕계 이하의 세계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구사론을 보면 아나함의 성인을 몇 가지로 다시 세분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색계에 태어나는 도중에 아라한이 되는 아나함도 있는데 이는 '생반'이라고 부릅니다. 색계에 탄'생'하면서 '반'열반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유행반이라는 아나함의 경우는 색계 이상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아라한이 되는 성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구사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무색계만을 추구하는 요가 수행자는 내생에 무색계천에 갇혀서 500억겁 이상을 내려오지 못하지만, 불교의 연기 지혜가 열린 성자는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대열반에 들기 직전에 무색계천의 경지도 모두 체험하신 후 색계 제4선의 경지에서 대열반에 드십니다.

색계 이상에서 아라한이 되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모두 그 시발점은 인간계입니다. 그래서 인간계에서만 성불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삼매만 닦아서 색계에 태어난 일반 천신의 경우는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욕계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수다원 이상의 불교 성인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인간계에서 유신견(아상)을 모두 끊었기 때문입니다.
 
글수정,삭제No. 130
이 름 원명 2005-07-11
남 긴 글 질문을 드립니다.

색계 이상에서도 수행해서 성불한다고 답변을 주셨는데

질문게시판 무색계는 물질계가 아니기에 관한 답변에서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정녕 성불은 해탈 열반은 인간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무색계에 태어나면 500억겁 동안 아래의 세계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를 잃어서 성불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처는 인간계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글수정,삭제No. 129
이 름 김희준 2005-07-08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포항교사불자회 향운 김희준입니다.

오늘 우연히 천리안 카페 '천불동' 전체 회원 소식 메일을 통하여 교수님의 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홈페이지를 만나는 인연을 얻었군요.

교수님이 우리말로 옮기신 용수보살님의 중론 3부작을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근기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서요.

포항교사불자회에서도 교수님을 가을 쯤에 한 번 찾아뵙고, 교수님의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인연이 생기기를
부처님전에 가만히 기원드려봅니다.

우선 급한대로 교수님의 강의를 이 홈페이지를 통하여
포항교사불자회 회원들이 접할 수 있도록 교수님 홈페이지 주소를 교사불자회 홈페이지에 올려 놓으렵니다.

늘 건승하시길 빕니다.
 
글수정,삭제No. 128
이 름 김성철 2005-07-03
남 긴 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에는 짐승의 몸을 받았을 때에도 배고픈 다른 짐승에게 몸을 보시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이런 선업들이 축적되어, 성불 후 부처의 복덕을 구족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축생의 삶이 악업의 과보로 초래된 삶이긴 하지만, 축생으로 살면서 선업과 악업을 짓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사향사과의 성인 중 아나함은 색계 이상에 태어나 그 곳에서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는 성인입니다.
색계 이상의 천상에서 수행의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또, 육도윤회 중생 모두에게 12연기의 이치가 작용하는데 십이연기설은 자업자득의 인과응보설이기에 그 어떤 세계에서도 선업과 악업을 지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127
이 름 원명 2005-07-03
전자우편 bluelotusam@hanmail.net
남 긴 글 안녕하세요? 궁금하게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6도 윤회에서 사람몸을 받았을 때만이 업을 짓고

천상이나 축생, 혹은 다른 몸을 받았을 때는 업을 받

기만 하느 건가요? 천상에서나 짐승몸을 받고도 선업을

지어 3선도 혹은 해탈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글수정,삭제No. 126
이 름 이대길 2005-06-28
남 긴 글 바쁘신 가운데 불구하고 소상한 답글 주심에
감사올립니다.

잘 양지했습니다.
 
글수정,삭제No. 125
이 름 김성철 2005-06-28
남 긴 글 불교의 시간관과 공간관, 즉 우주론을 알고자 하는 것은 결코 우문도 아니고 희론도 아닙니다.
초기불전은 물론이고 후대 아비달마 문헌에도 우주론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초기불전의 무기설(無記說)에서 '세간은 상주하는지 아닌지, 세간이 유변(有邊)인지 무변인지'와 같은 물음에 대해 부처님께서 답을 하지 않으시는데 이런 문제는 우주론이 아닙니다. 세간 상주의 문제는 전생과 현생이 이어지는지 단절되어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고, 세간 유변의 문제는 현생이 내생으로 이어지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은 불상부단, 불일불이의 연기 관계에 있는데 이를 상, 단 여부를 묻기에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답하신 것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불교 신행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세히 파악해야 할 중요한 교리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에서 윤회의 현장, 윤회하는 모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고집멸도 사성제 가운데, 고제(苦諦)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회의 진상은 '일체개고'입니다.
윤회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 열반을 진심으로 희구할 수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 내에 올려진 불교TV 강의에서 '11.삼계설 ... 17.십이연기설3'의 일곱 개 강좌 중 '초기불교의 우주론'에서 불교의 우주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삼계설은 '공간론'이고, 십이연기설은 삼계 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삶에 대한 '시간적 조망'입니다.


<시간론>
시간적으로 볼 때 우주는 無始無終하게 '성, 주, 괴, 공' 한다고 합니다.
우주는 성립되었다가(成) 머물다가(住), 파괴되었다가(壞) 텅 비고(空), 다시 성립되었다가 머무는 등의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 합니다. 마치 삼각함수의 싸인 곡선과 같이...

한 번 성주괴공하는데 80겁이 걸리고 이를 대겁이라고 합니다. 성겁, 주겁, 공겁, 괴겁 각각의 기간은 20겁이며 이를 중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겁을 소겁이라고 합니다.

사물은 생주이멸하고, 중생은 생로병사하며, 우주는 성주괴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호흡이나 신체감각의 무상을 자각하는 수행이지만, 이 거대한 우주 역시 무상합니다.

<공간론>
삼계설과 삼천대천세계설이 불교의 공간론입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에 삼계가 하나 갖추어져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태양은 별에 다름 아닙니다.
밤하늘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별마다 이런 삼계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체는 이곳 태양계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어디든지 살고 있습니다.
광막한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우리가 윤회하며 태어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무색계는 물질계가 아니기에 공간적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시간에 따른 공간의 변화>
우주가 성주괴공함에 따라 삼계도 수축, 팽창 합니다.
우주가 파괴된 공겁의 시대가 되면, 모든 중생은 삼계 가운데 색계의 제2선천 이상 하늘나라에 올라가 산다고 합니다.
색계 제2선천 이상은 빛과 같은 미세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에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손에 만져지는 물질은 파괴할 수 있어도, 빛은 만져지지 않기에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제2선천에 살던 중생 가운데 그 선업이 가장 먼저 소진된 중생이 제2선천에서 탈락하며 초선천에 태어나는데 이 생명체가 '창조주 행세를 하는 대범천'입니다.
대범천은 '나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이다'라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세계는 중생의 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대범천은 대망어(큰 거짓말)죄를 짓고 있다'고 비판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 홈피에 올린 불교TV 강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24
이 름 이대길 2005-06-27
남 긴 글 교수님께 청법합니다.

1)시간과 공간에대한 불교의 우주관은 어떤지요?


어리석은 우문(고의 해탈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희론)이라 조심스레 여쭙니다.

 
글수정,삭제No. 123
이 름 이대길 2005-06-26
남 긴 글 자등명(?)하겠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소상히 알려 주시는 교수님의 자비로운 모습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문에는 네가지 유형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아는 것을 너도 아느냐는 test목적.
둘째는 나의 지식을 과시하기위해 상대에게 알리기위한 것
셋째는 질문의 내용이 앞뒤가 안맞고 이상한 형태
넷째는 진실로 알고자하는 구도의 질문 일 것입니다.


대신 사과를 올립니다.

*자등명;어떤 상에 의지말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
그러나,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다르게, 용어의 선택이 잘못 사용된 듯함.꼭 쓰고자 한다면,나는 당신에게 묻지않겠습니다.이유는 나 보다 모르니까요...라는 표현이 더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수정,삭제No. 122
이 름 김성철 2005-06-26
남 긴 글 이 홈피에 들어오는 다른 많은 분들 역시, 오온에 대한 '분별적 이해'에 관심이 많을 것 같아서, 다시 답글을 올립니다.

아래, 아래 글을 올렸듯이, 오온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사태에 오온이 모두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체법에 대한 세 가지 분류법(三科說)에 대해 설명할 때 오온설은 상근기를 위한 것, 12처설은 중근기를 위한 것, 18계설은 하근기를 위한 것이라고 평합니다.

色, 受, 想, 行, 識의 오온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色'은 객관대상이고, 가장 뒤에 있는 '識'은 주관인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관이 객관을 대하듯이 '識'이 '色'을 대하는데, 色과 識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마음작용이 受, 想, 行입니다.

受는 보통 느낌이라고 번역하는데, 고,락,불고불락의 세 가지입니다. 괴롭고 싫은 느낌, 즐겁고 좋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느낌은 대부분 무덤덤한 느낌들일 겁니다.

想은 생각이라고 번역되는데, 범어로 samjna(특수표기 생략)라고 씁니다. 'sam'은 '함께'란 의미이고 'jna'는 '앎'이란 의미이기에 '함께 모아서 아는 것'이라고 풀이되는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연합(association)과 거의 그대로 일치합니다. 심리적 연합이란 '조건반사적 앎'입니다.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종소리'를 들은 개가 먹이를 떠올리며 침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상온의 작용입니다.
'종소리'와 '맛있는 먹이'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데,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울림으로써 개에게 '종소리=먹이'라는 생각이 각인됩니다.
우리가 눈으로 귤을 볼 때, 입에 침이 고이는 것 역시 이런 상온의 작용입니다. 귤의 둥그런 모양과 주황색은 신 맛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 어릴 때부터 귤을 먹어 보았기에, 귤의 형상만 보면 신 맛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관계가 없는 양자를 관계시키는 것'이 상온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온의 작용과 관계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머리 속에 자동차의 영상이 떠오릅니다. 원래 'ja-dong-cha'라는 소리와 실재의 자동차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심리적 연합이 일어나서 'ja-dong-cha'라는 소리와 실재의 자동차가 '필연적 관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짐승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바로 상온입니다.

行은 '조작'이라고 번역됩니다. 그 원어가 samskara이기에 '함께 모여서(sam) 지음(kara)'이라고 풀이됩니다. 즉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함께 모여 짓기'가 행의 의미입니다. '탐, 진, 치, 만' 등의 번뇌와 같은 갖가지 심리현상도 행이지만, 사물의 세계에서 인연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건은 모두 행입니다.

구사론에서는 세상 만사를 '5位 75法'으로 분류합니다.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행법, 무위법이 5위인데 이런 5위의 항목에 속하는 갖가지 법들을 75가지로 정리한 것이 5위 75법 이론입니다.

색법은 5근인 '안이비설신', 5경인 '색성향미촉', 그리고 무표색의 11가지로 재분류됩니다.
무표색(無表色)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색'이란 의미로 우리의 의식의 내용(法處) 가운데 포함되기에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계할 때 '앞으로 살생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표색입니다.
이런 다짐은 평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무표), 살생의 기회가 왔을 때 수계의 다짐을 떠올리고 살생을 하지 않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패인 골'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受와 想은 심소법에 속합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항상 존재하기에 '우리가 언제나 밟고사는 땅과 같이 큰 토대'라는 의미인 '대지법(大地法)'에 소속시킵니다.

行은 다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마음과 관계된 행'(心相應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과 관계된 것만은 아닌 행'(心不相應行)입니다.
마음과 관계된 행은 아래에서 얘기했듯이, 갖가지 번뇌들입니다.
마음과 관계된 것만은 아닌 행에는 생, 주, 멸, 명, 구, 문 등이 있습니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을 의미하는 생주멸의 경우,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나지만,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서 '교만한 마음'이 발생했다가 소멸하기도 하지만,
외부 세계에서 '천둥 소리'가 발생했다가 소멸하기도 합니다.

명, 구, 문은 문장, 단어 등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사유할 때도 이런 문장이나 단어를 사용하지만,
외부 세계에 속하는 '책'이나 '비석'에도 단어나 문장이 쓰여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주멸, 명구문 등을 심불상응행법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말한 2.受, 3.想, 그리고 行 가운데 심상응행, 즉 심소법에 속하는 4.行이 1.色과 2.識 사이에서 작용하는 마음작용(심소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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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색, 수, 상, 행, 식' 각각에 대한 '분별적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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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의 '근,경,식(촉)-->수-->상-->행'은 12연기설과 관계됩니다.
12연기설에서 '...육입, 촉, 수, 애...'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촉 -> 수'의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일 뿐입니다.

12연기의 각 지분 모두 오온을 갖추고 있습니다. 각 지분의 오온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을 지분의 이름으로 삼았기에 12연기 각 지분은 '증상연(增上緣) 관계'를 갖는다고 합니다.

12연기 각 지분을 펼쳐놓으면 삼세양중인과적이고 태생학적인 연기설인 <分位緣起>로 나타나고, 쌓아놓으면 한 찰나에 12지분 모두가 중첩되어 쌓여있는 <찰나연기>로 나타납니다. 언어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는 전자는 通時的 조망, 후자는 共時的 조망이라고 풀이되는데, 통시적 조망과 공시적 조망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12연기의 두 측면일 뿐입니다.
불교TV 강의 중 12연기에 대한 해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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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이 문제를 풀 때든, 그 어느 때든 오온은 모두 관여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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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고 무엇을 떠올릴 때 역시 오온 모두 작용합니다.
음악소리는 색온,
음악소리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수온(기쁨, 덤덤함 등등)
음악소리를 들으며 무슨 악기소리인지 연관시키는 것은 상온
음악소리에 집중하는 것 등의 의지적 행위는 행온
음악소리를 아는 것은 식온입니다.

참고로 구사론에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에 대해 요리에 비유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 그릇
수: 감자, 두부 등 음식 재료
상: 소금, 고추가루 등 양념
행: 요리하는 것
식: 요리된 음식을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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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은 찰나생멸인데 어떻게 무상함을 관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찰나생멸이란 말이나 무상하다는 말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초기불전에서 가르치는 무상을 아비달마교학에서는 찰나론에 의해 정교하게 이론화 합니다.

그리고 질문은 '흘러가는 것을 어떻게 관하는지?'란 의미 같은데,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관해 보면, 아까 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런 수행의 목적은 '고'와 '무아'(안주할 곳이 없음)를 알게 하는 것이고, 결국 열반을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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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을 관찰할 경우 그 관찰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

오온을 관찰할 때에도 오온 모두 동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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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교교리를 접할 때, 이론체계의 논리적 정합성도 추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론들의 취지입니다.

초기불전이든 아비달마교학이든 그 이론의 정합성을 끝까지 추구하면 항상 모순이 발견됩니다.

이런 모순을 드러내는 불교사상이 바로 반야 공사상이고, 중관학입니다.

초기불교교리나 아비달마가 내적 모순을 갖고 있지만, 그 취지를 수용할 경우 그런 교리는 우리의 인식과 감성을 정화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목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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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연구에서 초기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불교학계의 상식'입니다.

대승교학이 초기불교사상과 수미일관한 체계가 되도록 살려내는 것이 불교학의 과제 중 하나입니다.

또, 초기불전을 연구해도 불교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양파'는 알맹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먹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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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님의 질문에 대해 개괄적 답을 해 보았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권성우님은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분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공부에는 '지식공부'와 '감성공부'의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성공부는 '교만한 마음'(만), '화내는 마음'(진), '탐내는 마음'(탐)을 정화하는 공부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정화되어야 이 세상, 이 윤회의 세계에 대해 맺힌 한이 모두 없어져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진심으로 희구할 수 있게 됩니다.

불교공부에서 지식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성공부입니다.
수학에서 미분학 문제를 풀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하는 것이 '덧셈과 뺄셈'이듯이...

 
글수정,삭제No. 121
이 름 권성우 2005-06-25
남 긴 글 교수님..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후대?불교적이고

대승불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오온에대한 조망이라고 생각됩니다...

초기불교의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어떤 불교공부도 모래위에 쌓은 집처럼 견고하지 못하고

잘못하면 지적유희로 그칠 위험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초기불교교리와 수행체계는 생각할수록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건 21세기 불교학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등명하겟습니다....




 
글수정,삭제No. 120
이 름 김성철 2005-06-24
남 긴 글 권성우님
오온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불교TV 강의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가운데 초기불교 부분이나 구사학의 5위 75법 부분 중 어딘가에 설명되어 있을 겁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온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원래 '한 덩어리의 사태'인데 언어에 의해 이를 분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부산 범어사 강원에서 중관학 특강을 하고 왔는데, 오온과 관련하여 오늘 범어사에서 한 강의 내용 중 한 가지 소개합니다.

--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가르치는데, 수상행식 역부여시란 말을 풀면
수즉시공 공즉시수 ...
상즉시공 공즉시상 ...
행즉시공 공즉시행 ...
식즉시공 공즉시식 ...
이란 말이 됩니다.

색도 공이고, 수도 공이고 ... 식도 공이란 말입니다.

수학에서

A=B
C=B

라면

A=C

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공
수=공
상=공
행=공
식=공

이기 때문에

색=수=상=행=식

입니다.

즉 색이 수이고 수가 상이고 상이 행이고 행이 식입니다. 또 수가 식이고 행이 색이고 식이 상이고 색이 수입니다.

부처님이 마른 똥막대기 이듯이....

---------

우리 눈 앞에 컵이 보일 때, 이 컵은 '색'이면서, '수'이면서, '상'이면서, '행'이면서, '식'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을 따로 따로 떼어 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건은 오온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

그리고 행은 범어 samskara의 번역어입니다. 구사론의 5위 중 '수와 상을 제외한 심소법 전체'와 '심불상응행법 전체'가 모두 행입니다.

인간의 경우 탐, 진, 치, 만의 번뇌 모두가 행법에 속합니다.

--------------

그리고 <보리도차제론>(또는 <사분율>) 등에서는 불교를 설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청하지 않으면 강설해서는 안 된다.
2. 요청해도 그 요청자의 그릇을 보아 응한다.
3. 앉은 자에게 서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4. 누운 자에게 앉아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5. 높은 자리에 앉은 자에게 아래 자리에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6. 앞서 걷는 자에게 뒤따르며 강설해서는 안 된다.
7. 자세가 불손한 자(팔짱을 낌,삐딱하게 섬)에게 강설해서는 안 된다.
8. 가축이나 탈 것에 오른 자에게 강설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가 마구니가 되고 정법이 오히려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

이상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입니다.

앞으로 이 게시판에 올라온 글 대부분에 대해서는 답글을 올리겠지만, 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19
이 름 이대길 2005-06-24
남 긴 글 교수님 좀 고생하시겠습니다.허허허
 
글수정,삭제No. 118
이 름 권성우 2005-06-24
남 긴 글 교수님....

교수님께서 초기불교전공이 아닌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식물의 경우처럼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실것 같아서 한가지 질문드립니다...제 생명관이 조금 변했습니다....^^

보통 불교에서 修行한다라고 할때 행을 닦는다고 합니다...
즉 팔리어로 상카라(형성)을 닦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그만큼 불교가 마음의 형성력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온의 정신적인 요소 "수상행식"중에서

언제나 잘 구분이 가지않고 모호한 부분이 상,행,식입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쓰여진 불교개론서를 보면
보통은
상은 인식,표상,지각으로 번역되고
행은 형성,의지,결합,사고작용
식은 역시 인식,식별,요별,의식작용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함경을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행이 思로 되어 있으며
인간의 광범위한 정신작용중 대부분을 행(思)
에 넣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책을 보면 색수상행이 식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식이 가장 중추적이고 광범위한 정신작용이라고 합니다..(콘제 인도불교사상사)

어떤 분은 오온은 순서없이 모두 함께 찰나생,찰나멸 이라고 이야기하고 함께일어나는 오온中에서 어떤 지분이 강한가가 중요시된다고 합니다..

혹은

전반적으로 색-->수-->상-->행-->식의 순서로 일어난다라고 하는분도 계시고

그런데 또 아함경을 보면 근,경,식(촉)-->수-->상-->행
으로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불교하면 "오온무아"인데 오온의 이해는 불교의 중추요 심장인데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선명하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령 사지선다형의 문제지를 받은 수험생이

추리,유추,사고해서 답을 정하는 과정을 놓고 보자면

색수상행식이 모두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업을 만드는 요소는 없기때문에
행은 제외해야 하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예로 상상하는 작용(음악을 듣고 무엇을 떠올린다면)은 상,행,식중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도 알고싶습니다...

다른 예로 오온이 찰나생멸인데 어떻게

색이 무상함을 관하라..
수가 무상함을 관하라...
상이 무상함을..
행이 무상함을...
식이 무상함을 관찰할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오온을 관찰한다며 그 관찰하는 기능은 상인지
식인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지 혹은 불성(아뜨만)인지 알고 싶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합장..




 
글수정,삭제No. 117
이 름 권성우 2005-06-23
남 긴 글 지난번에 글을 올리고 지운것은 잘 아시다시피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쓸데없는 쪽으로 게시판이 진행되는것 같아서 지운겁니다...
그리고는 만법의 유식성을 이해했소....

왜 나는 이런의도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왜 이선생님은 이렇게 받아들여야만할까??라고 생각했소...

물론 올린글과 문장이 좀 투박하고 정제되지는 않앗지만 무슨악의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소....
그리고는 또한 주변의 조건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철저히 모든 주관과 판단이 변해야만하는 실존의 연기성을 재차 확인했소,...

왜 불교싸이트라고 꼭 걸맞는 이야기만 하고 그렇게 강조하는 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겁니다...

하단의 식물이야기도 숫타니파타를 근거로 해서 질문을 한것이고 자유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업과 과보의 측면도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번역된 아함경을 보고는 생각해본 측면이었데 이건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경전해석학의 문제일수도 있소....

오늘날 성서를 보더라도 “아”다르고 “어”다른것
가지고 해석되는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많은 신약성서의 판본이 전부다 조금씩 다르다오...

지난번 남조선을 이야기한것은 경주-->수운-->동학-->증산-->원불교
그리고는 “만국활개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이미지네이션되어서 글을 올린것이었는데

그런걸 가지고 엉뚱하게 문제삼을려고 하니 내가 글을 지우지 않게
되었겠습니까??

이름하여 만국을 살리는 위대한 종교사상이 한국에서 나온다는 의미요...

근세의 불교교학의 권위자이셨든 오대산의 탄허스님도 주역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한것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는 그냥 불교식으로 색수상행식이 임시로 가화합된 중생이고 불학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이 홈페이지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21세기는 다시금 불교사상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고 있는중이요....

불교는 연구되고 재해석 발굴해야 할분야가 한두가지가 아닐뿐더러

아직까지 전 세계적인 불교연구는 걸음마 단계도 되지 않았다고 목하 생각중이오...

오온의 개념만 보더라도 사실 오늘날 제대로 정립되지 않앗고 학자마다 제각기 다르오...

그리고 초기불교와 대승의 경전만 보더라도 상반되는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니오...

가령 붓다의 가르침에 근접한 “니카야”에보면 악업을 행하고 중음신이 된 중생에게
물위의 돌을 비유로 하면서 가라앉지 말아라고 기도한다고 무거운돌이 가라앉지 않겠느냐고
하는 부분과 후기경전인 우란분경같은 내용이 상반된다오....

그런데 뭐가 불교인지???

사실 따지고 들면 이런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오....

폐쇠적으로 내세울게 아니라 부단한 연구와 도모,대화,자기갱신속에서 모든 것은 창발적으로 발전해 가는것이요..^^

이만 줄입니다....








 
글수정,삭제No. 116
이 름 이대길 2005-06-23
남 긴 글 To;권성우씨

이 홈페이지는 동국대 김성철교수님의 불교에관한 질문과 적절한 응답을 나누는 게시판입니다.
비록 자유게시판이라고 하지만,그 자유라는 말에는 기본적인 예의와 소양이 있는 내용의 게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권씨의 올린 내용은 정체 불명의 애매한 그리고 이해되지않고 검증되지도않은 개인의 주관입니다.

여러차례 권유와 설득을 권씨에게 해보고 있으나 권씨본인은 전혀 개의치않는 듯 무시하는 데...도데체 정체가 무엇인지?

불교를 내세우는 척하면서,타종교를 선전하는 것같기도 하고,아니면 남조선이라는 표현을 하는 걸봐서 신고를 해야할지 그리고 본인의 주장을 지우고 나갔다가 다시들어오는 이런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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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115
이 름 권성우 2005-06-22
남 긴 글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하고 뒤져봐도 인류의 유산중 가장 위대한 유산은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동서양의 종교 철학 사상체계 가운데 도저히 그 심오함과 정교한 인간구원의 방법론적 깊이에서 감히 대적할 사상이 없는게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특히나 학계에서는 아직도 서양의 이런저런 말장난과 지적 유희에 불과한 복잡한 논리는 뽐내면서 잘 츄켜세우고 인용하면서도 불교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전반적으로
제 3세계 변방의 학문이나 종교정도로 치부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를 보면 사정은 더합니다..

대장경이 방대하다고 하지만 제대로 번역 연구 해석되고 있는 수준은 성서에 비해서 어림도 없습니다..

큰서점에 가봐도 뭐 그렇고 그런 쓸데없는 중생들의 온갖 잡다한 기만적인 책들만 하루에도 수백권이
나오지 제대로 된
종교서적인나 경전해설서 같은것은 너무 빈약합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특히나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과연 불교를 무조건 옹호하고 부처님을 내세우고 불상에 절하는것만이 불교냐
하는것입니다..

불교만 하더라도 오랜세월동안 이루어진 다양한 교파와 체계의 집합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고 면밀히 생각하고 검토한후에 너희들의 것으로 하라고 했을 뿐더러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하시기 전 나의 법과 율을 대조해서 나의 가르침이 있다면 내 말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했을 정도로 후세를 위해 마지막까지 그 치밀함을 보이셨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神이 그 사회의 모든 가치와 세계관의 중심에 있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왜 생명체가 윤회해야만 하는가가 모든 구도자와 젊은이들의 영적열망과
의문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시대에는 먹고 마시는것과 감각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듯합니다..

과학의 발전만 보더라도 그러한 것을 뒷받침하고

제대로 지탱시킬만한

사회적인 도덕적 기반이나 영적 잠재력이 전무합니다..

학계는 학계대로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침체와 기나긴 쇠퇴의 늪에 있습니다..

특히나 감각일색의 젊은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이 대오각성해서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걸맞는

21세기 이 혼탁한 가치부재의 시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할 위대한 대학승 대종교가가 나오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교수님,좋은 홈페이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114
이 름 김성철 2005-06-22
남 긴 글 <도간경>이란 불전을 보면, 연기를 내연기와 외연기로 구분합니다.
내연기는 생명체, 중생의 연기인 12연기를 의미합니다.
외연기는 식물이 씨앗에서 싹, 줄기, 가지, 잎, 꽃, 열매로 자라나는 과정입니다.
이와 아울러
내연기의 경우는 지수화풍공識의 육계가 助緣이 되고,
외연기의 경우는 지수화풍공時의 육계가 조연이 된다고 설영합니다.
중생에게는 식이 있지만 식물에는 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識 대신에 時를 조연으로 삼는 것입니다.

식은 마음을 의미하는데 식이 없으면 중생이 아닙니다.

지금 숫타니파타를 다시 뒤져볼 시간은 없지만, 인용하신 숫타니파타의 구절에서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이란 구절의 의미는 식물에 식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식물이 생명은 아니지만, 물론 광물에 비해서는 생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불전에서는 식물에 대해 중생 대신에 '생종(生種)'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몸을 생명체라고 할 때 우리 몸에서 자라는 손톱과 머리칼 같은 것이 식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성우님께서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시어 나름대로의 생명관을 정립하는 것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권성우님의 생명관은 불교의 생명관과 다릅니다.

또, 은행나무 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의 경우도 암술과 수술이 암놈과 숫놈의 역할을 합니다. 꽃가루가 사람의 정자에 해당하고, 암술 밑의 씨방 속에는 난자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식물이 열매를 맺어 2세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사람이 교미를 해서 자식을 낳는 과정과 똑같습니다.

식물이 중생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의도는 '살생업'과 관계됩니다. 어떤 '아름다운 철학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블교가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에도 그려셨지만, 지금도 권성우님이 쓰신 글의 내용이나 관점을 보면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는 분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교신자일 경우, <틀린 점을 찾기 위해> 불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생의 실상을 이해하고 나의 삶의 지침을 찾기 위해> 불전을 봅니다.

대지도론에서는 믿음이 없는 불교공부에 대해 '손이 없는 사람이 보배가 가득한 산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실컷 구경은 했으나 단 하나도 갖고 나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득바득 붙들고 늘어져 그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교를 가르치치 말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 논쟁을 할 경우 그로하여금 '불교를 비방하는 죄'만 짓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불교를 알려 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데, 하물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까지야....

권성우님의 경우 이번 글에서도 '불교가 틀린점이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운운하며 불교를 비방하셨지만, 전에 올렸다 지우고 나간 글에서는 더 심하게 불교를 비방하신 것 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제가 불교신문 기고문에서 적어 놓았습니다. '차선책'과 관련된 내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 홈피에 링크된 동국대 홈페이지의 추가게시판 내의 <김성철 신문잡지기고문>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틀린 점을 알려주는 것이 권성우님의 목적이라면 본 홈페이지에 들어오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교와 무관한 '재야철학자'로서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13
이 름 권성우 2005-06-22
남 긴 글 설사 양보해서 식물이 윤회하는 영역에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할지라도 흙이나 물과 같은 무정과 동일하게 본다는것은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 불교 하지만 과연 어디를 근거로 해서, 어디까지가 불교라고 하느냐가 문제시 됩니다..
물론 오리지날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잣대가 됩니다..


최초의 경전이라고 할수 있는 숫타니파타 "바셋타의 경"을 보면

-->세존께서는 바셋타에게 말씀하셧다.바셋타여,모든 생물에 대한 출생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겟다.그들에게 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풀이나 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비록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출생에 따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벌레나 나비~~

로 이어지면서 엄연히 식물을 하나의 생명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은행나무 같은 종자식물의 경우를 보더라도 암수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은행이 열립니다...

아마 "사문과경"같은데서 식물의 종자를 해치치 말아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것 같습니다..

식물이 윤회에 영역에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할지라도
큰 나무를 줄기차게 베거나 하는것은 엄연히 까르마가 됩니다..

불교가 틀린점이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중아함경에서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현생이나 내세에 받는다...
고의가 아닌경우에는 반드시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라고 되어있지만

가령 의사가 수술대위의 환자를 시술하다가 실수로 수술칼로
환자의 다른 장기를 건드려서 죽었다고 한다면
역시 까르마가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철처하게 마음의 변혁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방편의 가르침이라는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참고로 저는 쟈이나 교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종합적인 제 판단과 생각입니다...

황우석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도 불교계에서 제대로 문제를 인식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의도야 그럴듯하고 선한것 같지만

좀더 차원높은 경지에서 보자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소지가 거의 많을 뿐더러,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것이고,
(유전자 조작이 가능하다고 하는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한다면 인간이 악을 행할수 있다는것도 자연의 섭리라고 보는 논리?)

마치 얼굴이 못생긴게 고통스러운 중생에게 성형수술을 권

하는 외과의사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불교 업보론의 논리로 본다 하더라도 설사 성형을 해서 얼굴이 미남미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업보의 여력이 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다른차원에서 다시 못생긴 얼굴로 고생할것이고 중요한것은 생긴것에 연연하지 않는
근원적인 마음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글수정,삭제No. 112
이 름 김성철 2005-06-22
남 긴 글 아직 신문을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며칠 전 불교신문사의 부탁으로 <줄기세포>와 관련된 장문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신문이 발행되었다고 하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식물은 물론이고 산하대지가 모두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분별을 넘어선 '진제적 발화'이기에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세속의 분별적 윤리에는 적용될 수 없는 선언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와 반대로 '내가 생명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가운데 중생상이 바로 '내가 생명체라는 생각'입니다. 이 역시 진제적 발화로 세속의 윤리에 적용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으로 간주되고, 금강경에서는 우리 인간조차 생명이랄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모두 진제적 판단입니다.

진제에서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든지, 절대적으로 부정합니다. 우리의 세속적 분별을 깨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불교윤리는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세속과 관계됩니다. 불전에 등장하는 무차별적인 진제적 선언들은 속제인 불교윤리에 오버랩되는 조망일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식물을 해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식물은 중생의 거주처이기 때문에 식물을 해칠 경우 그 곳에 사는 벌레와 같은 생명체들이 함께 해침을 당하든지, 집을 잃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분율>을 보면 괴생종계(壞生種戒)라는 것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비구는 사과와 같은 과일을 스스로 따서 먹으면 안 됩니다.
나무에 달린 사과를 먹고자 할 때 정인(淨人)이라는 재가불자가 이를 따서 칼로 흠집을 낸 후 스님에게 드린 것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식물도 윤회하는 중생에 속한다고 보았던 자이나교도들로부터의 비난을 막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해도 그런 비난이 퍼져 갈 경우 일반인들이 불법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괴생종계는 승가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 제정된 율, 즉 규범입니다.
과일이 중생이기 때문에 이를 직접 따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과일을 따 먹거나 순수 식물만 해칠 경우 살생업과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작년 11월 8일에 어느 학생이 <식물이 생명체인지?>여부에 대한 질문을 동국대 게시판에 올렸기에 이에 대해 상세하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에 링크된 <동국대학교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자료실에 올린 글 가운데 324번과 323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내용은 앞에서 얘기드린, <불교신문> 기고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게 아니라, 그 글을 본 홈피에 링크된 <동국대학교 홈페이지> 우측 상단의 추가게시판 가운데 <김성철 신문잡지 기고문>에 올려놓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111
이 름 권성우 2005-06-21
남 긴 글 최근의 황우석교수의 배아줄기세포연구에 관해 이렇다할 불교계의 입장이 개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 생각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오늘날처럼 먹고 마시는 문제외에는 아무것도 문제?시될게 없는 이 담론의 부재,표피적이고 근시안적인 표면적인 가치관이 횡횡하는 시대에 그래도 이렇게 제 진지한 생각을 올릴만한 곳이 있다는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함경에 보면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 그리고 자궁에 식(간다르바)이 들어와야 합니다...

최근에 신문에서 어느 불교학자가 識은 기독교의 영혼개념으로써 불교의 무아론에 위배된다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이것은 전혀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천부당만부당한 단지 문제를 회피하는 무지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는 영혼이 언제 들어와서 결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 인식의 관건인것 같습니다...

배아이전에 이미 들어왔다고 한다면 줄기세포연구는 심각한 악업이 됩니다..

가령 하나의 사람을 해치는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사후의 문제가 증명이 되지 않는것처럼...

금세기 위대한 미국의 영능력자인 에드가 케이시의 전언에 의하면 대체로 영혼(간다르바)은 아이가 태어나기 얼마전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아이가 자궁에서 신진대사를 하고 커가는것은 육체적인
정령精靈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마치 자동차로 치면 이미 엔진도 돌아가고 있고 단지 운전자만 타지 않은 상태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것 같습니다..

가령 한의학에서 인간을 精氣神으로 분석하듯이 이미
활동적인 지와jiva는 들어오지 않앗다고 하더라도
精적인, 뭔지 모르게 미묘한 영적요소는 활동하고 있는것이지요...

마치 식물이 자라는것처럼...

하물며,화엄경에서 흙이나 티끌같은 무기물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이미 무기물속에도 미묘하지만 어떤 불성,생명의 요소가 있다고 보는것도 이것과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줄기세포연구에 반대입니다...

줄기 세포 역시 생명으로 보기때문입니다..


비록 識이 배아상태에서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어떤 적극적인 생명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노자의 무위사상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연의 정상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아무리 과학과 의학의 미명하에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오늘날 부처님께 물어보더라도 역시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땅을 때리지 말아라는 이야기는
경전어디에도 없지만 식물은 해치지 말아라는 말씀은 하셨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경전인 숫타니파타를 보면 부처님께서는 엄연히 식물도 생명의 영역에 두시고는 해치지 말아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두 거대담론이 부재한 이 시대에 미력하지만 제 견해를 올려 보았습니다...
 
글수정,삭제No. 110
이 름 김성철 2005-06-16
남 긴 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고 할 때, 이것과 저것이라는 변항에는 갖가지 항목이 대입될 수 있습니다.

긴 것과 짧은 것, 눈인 능견(能見)과 시각대상인 소견(所見), 원인과 결과, 업과 과보 등등...

긴 것이 있으므로 짧은 것이 있고...
...
업이 있으므로 과보가 있고...

-----------

그런데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는 연기공식으로 표현된 이런 대립쌍 가운데 '업과 과보'와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기공식에 업과 과보를 대입할 경우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겁니다.

어떤 업을 지었기에 그에 대한 과보가 있고,
어떤 업을 짓지 않았으면 그에 대한 과보가 없다

그런데 이런 '업과 과보' 가운데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쪽은 '업'이고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 쪽은 '과보'입니다.

현재정님께서 '결정론'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일면 맞는 말씀인데 이는 과보에만 해당합니다. 과보는 업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현생을 살면서 겪게 될 갖가지 길흉화복, 즉 고락은 모두 과거나 전생에 지었던 업에 의해 결정되고 성숙되어 온 과보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짓는 업은 자유의지와 관련됩니다. 전생이나 과거에 지었던 업에 의해 현생이나 미래에 받을 과보가 잠정적으로 결정되어 있긴 하지만, 지금 짓는 업에 따라 그런 과보에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악업이나 선업을 많이 지을 경우 미래에 닥칠 불행이나 행복이 더 빨리 오게 되고, 악업에 대한 참회를 할 경우 미래나 내생에 올 고통의 과보가 줄어들거나 사라집니다.

따라서 전생에 지었던 업의 종자는 결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아닙니다.
현생에 짓는 선악의 업 및 참회 등의 행위로 인해 업종자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설, 인과응보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전생에 지었던 갖가지 업종자가 발아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업을 짓는 모든 순간이 자유의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업을 짓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이치를 '자유의지는 마치 간헐천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 문서자료 페이지에 올린 제 논문 가운데 '무란 무엇인가?'란 논문에, '간헐천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 이상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팔불게의 팔미(八迷)를 '생일상거(生一常去)'와 '멸이단래(滅異斷來)'로 묶은 사람은 중국 수나라 때 삼론학을 집대성했던 길장스님입니다.

씨앗 속에 싹이 있다는 것은 '생, 일, 상, 거'의 사고방식이며, 지적하신 대로 싹에 본질적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생일상거와 멸이단래가 아닌 팔부중도, 즉 불생불멸, 불일불이... 불거불래의 팔불이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모습에 대한 중도적 조망, 즉 참된 조망입니다.
 
글수정,삭제No. 109
이 름 현재정 2005-06-16
남 긴 글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중론(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과 중론 번역본을 잘 읽고있습니다. 중론에 관한 대중서가 그리 많지 않던데 좋은책 써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쉽게 쓰실려고 하신거 같지만 저에게는 그리 쉽지 않더군요. 하나하나의 논리가 그물처럼 얽혀있어서 읽을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게시판에 글을 올린것은 다름이 아니라 결정론 때문에 고민이 생겨서 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르침을 펴신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이론인 연기설에 따른다면 앞의 원인이 뒤의 결과를 결정지으니까 이것을 결정론으로 볼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아무리 읽어봐도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결정된다는 결정론으로 해석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따로 분리해 놓고 생각해 볼수 없다" 이것을 바탕으로 의문을 풀어볼려고 했는데 이해의 깊이가 부족해서 그런지 잘 안됩니다.

불교가 왜 결정론이 아닌지 쉽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질문이 더 있는데요.

씨앗에서 싹이 발생한다.

발생된 싹은 씨앗에 있던 경우라 착각할 경우 生,一,常.去로 해석될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본질적 실체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는 건가요?
 
글수정,삭제No. 108
이 름 김성철 2005-06-16
남 긴 글 어제 하루 종일 단 5분의 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제작한 <불교 포교용 플래시 시사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 홈페이지 영상자료 페이지 중간에 플래시 작품들을 모두 올려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김종헌의 심우도 작품>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집에 들어가 불교신문사로부터 청탁받은 <줄기세포> 관련 원고를 작성한 후 아침에 출근하여 신문사에 원고 보내고 이제야 게시판에 글을 올립니다.
지금은 옆에서 한 학생이 기말시험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
각설하고, 어제 올린 김종은님의 글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유식불교 내에서도 종자에 대한 이론이 갖가지입니다. 무루종자가 원래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본유설도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롭게 생긴다는 신훈설도 있고, 양자를 종합한 이론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 유루인지 무루인지에 대해서도 대승과 소승이 의견을 달리 합니다. 대승에서는 모두 무루라고 하고, 소승에서는 십팔계 가운데 5근과 5경은 유루이고 6식과 의근, 법경만 무루라고 합니다.

따라서 대소승과 선불교를 회통하는 유루, 무루의 이론을 구성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앞으로 '체계불학'의 과제가 될 것입니다.

김종은님은 '부처가 되면 모든 유루의 종자는 사라지고, 무루의 종자만 남는다'고 쓰셨는데 이는 <성유식론>의 원전에서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유식론 원문을 본 홈페이지 자료게시판에 올려놓겠습니다.
저의 경우 지금 성유식론을 비롯한 유식문헌 모두를 뒤져 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무루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번뇌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고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번뇌는 오온 가운데 행온에 속하고 고락은 수온에 속합니다. 행온은 업의 근원이고, 수온은 과보에 속합니다.

감수되는 고락에 대해 다시 애증 등(탐진치)을 내어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 내에 무루의 종자만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초기불전에서 '아라한은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이를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깨달은 사람'은 병에도 걸리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좀 이상할 겁니다.
다만 자신이 걸린 병과 자신이 느끼는 고락에 대해 삼독심으로 반응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어떤 이론이라고 해도 언어에 의해 구성된 것은 내적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을 지적하는 불교학이 바로 중관학입니다.

원효스님 역시 <판비량론>을 통해, '현장스님이 번역한 신역 불전들'의 내적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신행하며 공부할 때, 김종은님 처럼 이론의 일관성을 찾아 보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유식론>이 慈恩 (窺)基의 건의에 의해 현장스님이 임의로 재편집한 논서이기에, 지금의 우리들이 불교 유식학을 내적 일관성을 갖도록 명쾌하게 조직해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김종은님은 불교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는 분 같습니다.
앞으로 <성유식론> 등의 유식학을 현대적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작업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보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07
이 름 김종은 2005-06-15
남 긴 글 향상 친절하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과보는 받지만 과보에 미혹되지 않는다"
는 말에 대해 과보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않됩니다.
참회하지 못한 업에대해 과보를 받는다 하는데...
유식에서는 아라한위에 이르면 신체의 보존을 위해 아뢰아식이 존재하기는 하지만..그 안에 있는 종자가 오직 무루의종자로 악업의 종자는 일체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악업의 종자가 없는 가운데...어떻게 참회되지 않은과보가 현행할 수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읍니다.
제가 선사상에 대해서만 이해할때는 교수님께서 답변해주신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식을 보다 생긴 혼란입니다
 
글수정,삭제No. 106
이 름 김성철 2005-06-14
남 긴 글 제 전공이 유식학은 아니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 답해 보겠습니다.
유식학에서는 우리의 마음(識)은 총8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前5識인 '안이비설신'식과 제6의 의식, 제7 마나식, 그리고 제8 아뢰야식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아니라) 부처가 될 경우 이런 총8식이 모두 지(智)로 바뀐다고 합니다.

중생이 보살행을 통해 부처가 될 경우 전5식은 성소작지로 바뀌고, 제6 의식은 묘관찰지, 제7 마나식은 평등성지, 제8 아뢰야식은 대원경지로 바뀐다고 합니다.

성소작지는 눈으로 맛보고, 귀로 보고, 코로 듣는 등 오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신통력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묘관찰지는 일체가 공함을 파악하는 절묘한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평등성지는 나와 남을 구분 않는 동체대비의 지혜입니다.

대원경지는 큰 거울에 비치듯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될 경우 이렇게 네 가지 지혜가 생기는데 이런 지혜의 종자를 '무루종자'라고 부릅니다.

이상은 김종은님의 질문에서 사용된 무루종자, 대원경지 등의 의미에 대한 교학적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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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종은님께서 올린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겁니다.

'무루지를 갖춘 부처나 아라한도 몸이 아프거나 해를 당하는 과보를 받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선가의 '전 백장, 후 백장' 일화에서 말하는 '불타인과'와 불매인과'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먼 과거의 백장 스님(전 백장)이 '대승보살은 인과응보를 받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불타인과(不墮因果)'(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즉 받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가, 그것이 죄가 되어 여우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먼 세월이 지나 '후 백장' 시대에 어떤 노인이 '후 백장' 스님을 찾아와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 후 백장 스님이 '불매인과(不昧因果)'(인과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감사를 표하고 물러갔는데, 산에서 죽은 여우의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여우 몸을 받았던 '전 백장' 스님이 노인으로 둔갑하여 '후 백장' 스님을 찾아와 과거에 자신이 잘못 대답했던 질문을 다시 던진 후, '후 백장' 스님으로부터 정답을 알아냄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여우몸에서 벗어났다는 선가의 일화입니다.

물론 이것이 신화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라한이나 불보살과 같은 성인이 인과응보 속에서 사는지, 아닌지?'라는 물음에 대한 정답이라고 생각됩니다.

'과보는 받지만, 그 과보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참회하지 못한 죄업에 대해서는 과보를 받지만 그런 과보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 불보살과 아라한입니다.

부처나 아라한의 경우, 남의 눈에는, 신구의(身口意) 삼업도 짓고 전생의 업에 대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는 신구의 삼업도 짓지 않고 전생의 과보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습니다.
일체가 공함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열반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금언이 등장하는 겁니다.

남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말씀도 하시고 걸어가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 스스로의 견지에서는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걸어가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수년 전 돌아가신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께서 열반송을 통해 '한평생 분주히 돌아다녔으나, 한 발 걸음도 떼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의미 역시 위와 같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 홈페이지 내의 <불교교리 문답게시판>에도 이와 유사한 질문과 제 답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글수정,삭제No. 105
이 름 김종은 2005-06-14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십니까...먼저 교수님 덕분데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질 배우게 된데 감사드립니다....이 사이트가 제 컴퓨터의 시작페이지입니다....^^
요즘 유식을 보고 있는데... 궁금한게 있어 글을 올림니다.
유식에 보면 아라한위에 오르면 아뢰야식이 대원경지로 전환되면서 일체 유루종자가 무루종자로 바뀐다고 하는데...
그러면 부처님께서나 그 제자들중 어떤 분은 전생의 일로 몸이 아프거나 해를 당하시기도 한 일이 경전에 나오는데...일체 악업의 종자가 사라진 아라한위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합니다....그냥 인과를 믿게 하기위한
방편일까요..
 
글수정,삭제No. 104
이 름 김성철 2005-06-13
남 긴 글 본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대불련 강의 <사회참여를 보는 불교의 눈>을 클릭할 경우 <컴퓨터를 켜자마자 자동으로 꺼지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바이러스는 아닌 것 같고, 잘못된 종교관을 가진 능란한 해커가 <불교정보센터>의 서버를 파괴하기 위해 계속 침입하여 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고를 입은 컴퓨터의 경우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 컴퓨터가 복구됩니다.

1. 컴퓨터를 재부팅한다.
2. 부팅 도중에 F8키를 누른다.
3. 안전모드로 들어간다.
4. 안전모드 상태의 바탕화면이 뜨고 <창>이 뜨면 <아니오>를 클릭하여 <시스템복원> 기능으로 들어간다.
5. 달력이 보이면 <대불련 강의> 듣기 전의 적당한 날짜(진한 활자)를 클릭하여 그 날짜의 컴퓨터 시스템으로 복원한다.
6. 복원이 끝난 후 <시스템이 심각한 오류로부터 복구되었습니다.>라는 창이 뜨면,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켠다.

 
글수정,삭제No. 103
이 름 김성철 2005-06-13
남 긴 글 경주에 대승기신론 강의 모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주중에 경주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한 공부 시간이기에 경주에서는 거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경주의 불교공부 모임 등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 적습니다.

그런데 경주 동국대 선학과 교수이신 유진 스님의 강의 가운데 대승기신론 강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진 스님 전화번호는 054) 779-2113입니다.
 
글수정,삭제No. 102
이 름 신오유 2005-06-12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가을학기에 님의 강의가 없다니 아쉽군요.

그러나 게시판을 통하여 접하길 희망합니다.

묻습니다.

경주에 ((대승기신론))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는지요?
서울에는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글수정,삭제No. 101
이 름 강병균 2005-06-10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감사합니다.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100
이 름 김성철 2005-06-10
남 긴 글 이번 방학 이후 1년간 연구년에 들어가기에, 내년 8월말까지 서울의 연구실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고구려의 승랑 스님에 대한 연구 때문에 앞으로 1년 간은 어디에서도 정기적인 강의를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음 학기에 동국대 경주캠퍼스 야간의 불교대학원에서 양승규 박사님이 중관학을 강의하실 텐데, 교수님께서 원하신다면 양박사님께 말씀드려서 청강을 주선해 보겠습니다.

경주 동국대 야간 불교대학원의 경우 경상남북도 소재 사찰의 주지 스님들, 각 강원의 강사 스님들, 불교단체 종사자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분들이 많이 다닙니다.
부산에 사는 분들은 단체로 버스를 대절하여 통학할 정도로 공부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글수정,삭제No. 99
이 름 강병균 2005-06-09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혹시 다음학기 중관학강의를 청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

지난번 말씀으로는 중관학책 집필중이라고 안하셨나요?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98
이 름 김성철 2005-06-09
남 긴 글 다음 학기부터 1년간 연구년에 들어가기에 학부와 대학원 모두 제 강의는 쉽니다.

5년 근무하면 연구를 위해, 집중적 연구를 위해 강의를 쉬는 제도가 연구년 제도입니다.

다음 학기 학부와 대학원의 <중관학> 강의는, 양승규 박사님이 담당하실 겁니다.

양승규 선생님은 티베트 중관학을 전공하신 분입니다.

십여 년 전 링 림포체 스님이 방한하셔서 TV에 출연하셨을 때, 통역을 담당하셨을 정도로 티베트어에 능통하십니다.

인도 내의 티베트 사원에서 오랜 기간 공부하셨기 때문에 아주 유익하고 신선한 강의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1년간 <승랑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만들 예정입니다. 1년 내내 서울의 연구실에서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97
이 름 신오유 2005-06-08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제 봄학기도 끝나고
방학이군요.

다음 가을 학기는 뭘 맡으실런지 궁금합니다.

요즈음 환율하락으로 경기가 아주 좋치 않은 탓인지
생업이 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늘 허전하고 딱 이것이다고 말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있어 몸이 공중에 떠있는 듯 합니다.

조그만 소기업이지만 딸린 직원들이 있기에,걱정은 더욱 더 합니다.

이럴땐 어떤 공부를 하면 도움이 될까요?

 
글수정,삭제No. 96
이 름 김성철 2005-06-06
남 긴 글 5월 20일에 있었던 '대불련' 강의를 링크해 놓았던 <불교정보센터> 임시 카페(http://cafe.naver.com/budgate.cafe)에 들어가 보니 <불교정보센터> 홈페이지 마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합니다.

"불교정보센터 홈페이지가 운영되는 서버가 6월1일 오후부터 해킹으로 추정되는 행위로 인하여 정상적인 작동이 이루어지 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불교정보센터 홈페이지는 물론, 동일서버에서 운영되는 불교상담개발원,풍경소리,가족아카데미아등의 홈페이지 또한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불교정보센터 운영진은 문제점이 발견된 즉시 복구 노력에 들어갔으나 발생한 사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해 며칠간의 복구기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글수정,삭제No. 95
이 름 김성철 2005-06-05
남 긴 글 대불련(대학생불교연합회) 강의 <사회참여를 바라보는 불교의 눈> 링크는 6월 8일에 복구됩니다.
동영상을 보내주는 불교정보센터(www.budgate.net)에서 6월 7일까지 사이트를 점검한다고 합니다.
 
글수정,삭제No. 94
이 름 임동숙 2005-05-28
전자우편 seandsky@naver.com
남 긴 글 아이고 참말로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순수하신 지원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그런 채찍담긴 격려로 다가옵니다.

솔직히 실토합니다만,
제가 화엄동산이란 곳에서
얼마나 난장판 전쟁통같이 아줌니들이랑 싸우고 강제퇴소시키고 큰소리내고 하는지, 모르셔서, 좋게만 보실 것입니다.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교수님의 순수하면서도 힘있는 열정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글수정,삭제No. 93
이 름 김성철 2005-05-25
남 긴 글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이 불교수행은 아닐 겁니다.

대학시절 이후, 교학공부로 바쁘지 않을 때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가부좌 튼 수행을 했는데, 요즘은 시간을 내기가 힘듭니다. 그야말로 일주일에 한 번 가부좌 틀기도 쉽지 않습니다.

간화, 위빠싸나, 자비관 등 '가부좌 튼 수행 흉내'는 모두 조금씩 내 보았습니다.

불교를 강의하는 사람의 장점은 학생들에게 '좋은 말'만 하다 보니까 남이 보지 않더라도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불교수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계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악구, 불양설, 불기어, 불탐, 부진, 불사견의 10선계를 떠올리며 이를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재가불자가 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수행은 지계행과 참회기도인 것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92
이 름 김성철 2005-05-22
남 긴 글 강병균 교수님
감사합니다.

경주 동국대 제 홈페이지 상담실에 <여성노숙자쉼터> 홈피를 링크해 놓았는데, 그 링크를 통해 들어가면 홈피 전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익스플로러 주소창에
주소(http://www.womenhomeless.or.kr)를 넣고 들어가도 홈피 전체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노숙자쉼터 홈피 첫화면 아래에 '회색 나무 담장' 모양의 메뉴가 나타날 때까지 익스플로러의 '새로고침'기능을 클릭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무 담장 사이에 하얀 진도개 한 마리가 보이고, 설립시기, 주체, 활동, 후원방법 등을 알 수 있는 메뉴가 보일 겁니다.

임동숙씨는 그곳에서 사무장(총총: 총명한 총무)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글수정,삭제No. 91
이 름 강병균 2005-05-22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교수님이 실으신 여성노숙자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읍니다.
그런데 이 홈페이지에는 자신들의 단체에 대한 소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단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규모, 연혁,직원들 경력, 설립동기,위치,기부할 예금구좌번호와 예금주, 등등...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90
이 름 김성철 2005-05-21
남 긴 글 기억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래 글 올린 임동숙씨는 본 게시판 11번 항목에 글을 올렸던 분입니다.
재작년 참여불교 세계대회 때 처음 만났는데, 11번 글을 보고 여성노숙자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가,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홈페이지 모두 임동숙씨가 자작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박광서 교수님 등 참여불교재가연대에 관여하는 분들로부터도 임동숙씨와 관련된 좋은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제 처와 함께 우먼홈리스 홈피에 방문했다가 감동하여 도움을 드리자는 말도 했었는데,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불교인의 사회복지활동의 귀감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어제 대불련 강의 때 예기치 않게 만나 뵙고는, 받은 강사료를 모두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임동숙씨의 '팬클럽'이 만들어진다면, 저와 제 처가 함께 앞장 설 것 같습니다. 앞장 서고 싶은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여성노숙자 쉼터...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우리 같은 팬들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고 계속 좋은 모습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위탁운영하는 여성노숙자쉼터(현재 27명의 노숙자 분들이 생활한다고 합니다.)에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womenhomeless.or.kr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할 때, 사회복지활동은 재가불자의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임동숙씨 건투를 빕니다. <아자!>
 
글수정,삭제No. 89
이 름 박보경 2005-05-21
전자우편 namu307@hanmail.net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제 강의를 듣고,찻집에 동행했던 간호대학생 박보경입니다.
기분좋은 5월의 저녁,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무겁고, 의문투성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느낌이 한곳에 주저함이 없이,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하는 과정의 시작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보리도차제론',머리맡에 두고, 읽고 읽고 새기겠습니다.
어제 저녁 교수님과의 인연에 더없는 감사를 드리며,
다음기회에도 이같은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래 봅니다.
건강하세요, 교수님^^



 
글수정,삭제No. 88
이 름 임동숙 2005-05-21
전자우편 seansky@blue.korea.com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어제 저녁 두통이 심한 머리통 들어올려가며,
천근보다 무거운 눈껖풀 들어올려가며,
(그래도 강의 들은 시간보다 놓친 시간이 더 많았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사온대
교수님 강의료(예상치도 못하게 제 손에 건네진 그 두꺼운 무게감의 봉투가 사실은 얼마나 황송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히히 웃었지만 말입니다)를 그렇게 저희 시설 후원금으로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주상보시를 말씀하셨어도, 저는 기어이 만천하에 드러내서 감사의 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후원금을 여러 번 받아보았지만, 어제처럼 독특하고 울컹거리는 경우도 잘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하자고 찾아간 자리에서, 공부를 가르쳐주신 분이, 그렇게 돈까지 그냥 저에게 다 내어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생각할 수록 꿈틀꿈틀 감정적인 움직임이 생겨나는 것이, 여러 가지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져서 오직 '깡다구'하나로 버틸 때 까지 버텨본다는 뭐 그런 '지혜롭지 못한' 처신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저에게, 불교계에서 재가불자로 일을 하고 가치체계를 잡아간다는 것이, 가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지만ㅋㅋ, 대부분은 부표없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속에 살아간답니다.

하지만 출가자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고 해서 제가 안고 지고 가는 이 근원적인 불안과 고통이 해소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발상이 매우 불경하고 발칙하고 소인배의 아집으로 비춰질수도 있지만, 이 자존심 하나로 버틸 수 있을때까지 버텨볼 생각입니다. ㅋㅋ 이렇게 용쓰면서 사는 것이 어떤 때는 매우 비불교적이지 않을까 또다시 회의가 덧붙여지기도 합니다만... 어떤 것이 불교적인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제 나름대로의 원칙들을 세워보고 허물어지면 또 세워보고 여러 번 반복해 본 다음에... (사실 그런 과정 자체를 매우 즐기고 있습니다. 즐긴다고 해서 'funny'하다는 것은 아니구요, 음.. 'happy'정도가 좋겠군요)

그래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된 것도, 교수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고 개방적인 홈페이지를 열어놓고 계신 것도 모두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임동숙 두손모음
 
글수정,삭제No. 87
이 름 이대길 2005-05-21
남 긴 글 존경하는 김성철교수님,강병균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글과 사상을 잘 읽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지적과 친절한 답글에 저의 공부는 나날이 깊어갑니다.

그러나,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인 엉터리 생각을 마치 자랑이나 하듯이 올리는 것은 읽는 사람에게 참 부담스럽습니다.책 한권 신문 한조각 읽고 마치 그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듯이 자랑을 하는 경우는 이 게시판에 나타나지 않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의 출처가 있어야되고,또한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기껏 밀레라빠정도...)이 말에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두 교수님의 날카롭고,바른 정법을 기대합니다.

 
글수정,삭제No. 86
이 름 김성철 2005-05-20
남 긴 글 이대길님, 김갑수님 감사합니다.
권성우님이 아래에 올렸던 모든 글을 지운 것 같은데,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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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85
이 름 이대길 2005-05-20
남 긴 글 권성우선생께

권선생이 말씀한 티벳에관한 no.88번(기껏)에대한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84
이 름 이 대길 2005-05-20
남 긴 글 권성우 선생께

티벳의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기껏 밀레라빠...라고 언급하셨는 데...

글쎄요..

기껏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무었인지요?

티벳은 수천년의 장구한 문화와 사상을 지닌 지상의 보고입니다. 깊고 높은 사상과 독특한 문화를 지닌 신비스러운 곳이지요.

하오니 기껏이라는 그 표현은 좀 그렇군요.

경청해주셔서 김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83
이 름 김갑수 2005-05-20
남 긴 글 -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 권위적으로 말하는 ....이라고 말씀 하셨는 데,주체가누구인지요?

-부처님의 경전을 말하거나 적을 때엔 어떤 형식과 예의가 있답니다.예를 들면 대반열반경이라는 경전을 적을 때에는 쌍꺽세를 쒸운답니다.

 
글수정,삭제No. 82
이 름 김갑수 2005-05-20
남 긴 글 권성우님께
권선생님은 불교의 경전을 얼마나 많이 접하고 생활에서 실천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만,아마도 많이 공부하시고 수행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근데말이죠....

여기 게시판은 모든 불자들이 공부하는 장소인데
선생의 표현이 좀 과격하신 것 같아 그 점을 좀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함경외에는 불설이 아니다:이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수많은 기라성같은 학자들도 함부로 단언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비록 직접 설하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제자들의 설법을 인가하셨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마치 한 기업에서 과장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낼경우에 사장이 결재하는 것처럼,비록 사장의 기획이 아니더라도,동의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을 것입니다.

-
 
글수정,삭제No. 81
이 름 김성철 2005-05-19
남 긴 글 권성우 님의 질문에 대한 답들입니다.

1. 쫑카빠 스님의 다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것이 없습니다.

티베트인들은 빠드마삼바바와 아띠샤와 쫑카빠(서력 1357-1419) 세 스님을 티베트 불교의 영웅으로 간주하는데 이 세 분의 존영을 벽에 걸 때, 중앙에 가장 큰 그림으로 쫑카빠 스님의 존영을 모신다고 합니다.

현재는 제14대 환생 달라이라마스님이 활동하시는데, 겔룩파의 시조인 제1대 달라이라마 스님이 쫑카빠 스님의 조카이면서 제자였다고 합니다.

저는 부처님 이후 지혜가 뛰어났던 분은 용수와 세친 같은 분들이지만, 자비심이 가장 큰 분은 쫑카빠 스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리도차제론>이라는 저술 때문입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읽으면서 그 심성을 개조시키는 책이 보리도차제론입니다.
쫑카빠 스님의 <법보시>의 자비심은 위대합니다.
현재 티베트인들의 강력한 불심의 원천은 바로 <쫑카빠 스님의 3사도 수행체계>에 있습니다.
3사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문서자료> 가운데 논문 25번 <티베트불교의 수행체계와 보살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강의시간에 <보리도차제론>의 티베트 불교를 '성인을 양산하는 공장'이라고 평합니다.
그 어떤 사람이 입문해도 '종교심과, 도덕성과, 출리심과 자비심과 지혜'를 갖춘 성자로 개조해 주는 불교신행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던 사람이나, 화를 잘 내던 사람이나, 교만했던 사람이나, <삿된 종교>에 빠졌던 사람 모두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에 따라 차례차례 수행할 경우 성인과 같은 사람으로 개조가 됩니다.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2. 불교에서는 식물을 중생의 범위에 넣지 않습니다.
육도윤회의 세계에 식물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식물을 중생이라고 보며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논쟁이, 불교인식논리학자인 다르마끼르띠의 저서에 실려있기도 합니다.

식물은 생명체가 아닙니다.
DNA가 생명체가 아니듯이...

3. 증산교와 관련된 문제는 권성우님께서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불필요한 논쟁의 소지가 될 문제는 게시판에 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글수정,삭제No. 80
이 름 강병균 2005-05-19
남 긴 글 일체 망념을 쉬면 진리가 드러납니다.
배꼽이니 아니니 그런 망념을 쉬어야 합니다.
 
글수정,삭제No. 79
이 름 이범기 2005-05-16
남 긴 글 강지연님.
본 홈페이지의 동영상강좌인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제6강 불교흥기의 사상적배경2 강의편에서
선생님께서 자이나교의 교리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하셨습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_()_
 
글수정,삭제No. 78
이 름 김성철 2005-05-16
남 긴 글 미안합니다
자이나교와 관련된 모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글수정,삭제No. 77
이 름 강지연 2005-05-15
남 긴 글 안녕하세요 김성철교수님
저는 현재 교대에서 종교에 관한 강의를 듣는 학생입니다.
강의는 학생들의 자료조사와 관련자의 인터뷰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 지는데요.
제가 이번에 자이나교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교수님께서 자이나교인이나 모임에 대해 알고 계시다면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고요 멀지 않으면 방문할 수 있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76
이 름 김성철 2005-05-15
남 긴 글 아래 글을 다시 읽어 보니 두 세 군데 잘못 기술된 부분이 발견되어서 수정했습니다. 논리학과 관계된 얘기는 문구 하나만 잘못 써도 그 내용이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수정된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
A면 B이다.
그런데 A가 "아니다"("이다"를 수정).
그러므로 B가 "아니다"("이다"를 수정).
-----
이 추론식은 그 "소전제"("대전제"를 수정)가 전건을 부정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
이 경우에는 이들을 떼어서 별도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오류를 범하는 "비현실적인"(이 말을 추가함) 일이 됩니다.
------------------------------------------------------

5월 15일 오전 11시
 
글수정,삭제No. 75
이 름 김성철 2005-05-14
남 긴 글 감사합니다.
얘기가 점점 깊어집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중론의 기술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서양논리학에서 말하는 <전건부정의 오류>입니다.
그래서 반례가 발견되는 것이지요.
전건부정의 오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A면 B이다.
그런데 A가 아니다.
그러므로 B가 아니다.
(이런 추론은 오류에 빠지며, 이를 전건부정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이것이 고래라면 이것은 포유류이다
그런데 이것은 고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포유류가 아니다.

와 같은 추론식은 오류를 범합니다. 고래는 아니지만 이 동물이 고양이일 경우 포유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뜨만이 있으면 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뜨만은 없다
그러므로 귀로 볼 수 없다.

는 중론의 설명은 <전건부정의 오류>를 범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논리철학에서는 <전건부정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를 몇 가지 말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비현실적 가정문>인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어제 비가 왔다면 소풍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풍을 갔다

이 추론식은 그 소전제가 전건을 부정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뜨만 운운하는 중론의 추론식 역시 <비현실적 가정문>이기에 논리적 오류에서 벗어납니다. 이를 다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는 아뜨만이 없는데,)
만일 아뜨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귀로 볼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아뜨만은 없다.
그러므로 귀로 볼 수 없다.
..................
이는 중관학을 연구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대의 논리철학과 관련된 <가장 첨예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학을 연구하시는 교수님이시기 때문에 정확히 포착하시고 문제를 제기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얘기 한다면, 초기불전에서 <연기>를 표현하는 말들 모두가 전건부정의 오류를 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다.
무명이 없다.
그러므로 행이 없다.

이 경우, 비현실적 가정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이유는 <전건과 후건이 internal relation을 갖기 때문>입니다.
개념 간의 관계에는 external relation과 internal relation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식논리학에서 말하는 전건과 후건에 해당하는 개념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실체로 extenal relation을 갖거나 일방적 내포관계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 이런 사태 간의 논리 관계에서는 <전건부정의 오류>가 지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관계를 말할 때 사용되는 전건과 후건의 개념들은 internal relation을 갖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들을 떼어서 별도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오류를 범하는 비현실적인 일이 됩니다. 불교용어로 개념과 개념을 <분별>하는 잘못이지요. 논리용어로 표현하면 <비현실적인 가정>입니다.
'서로 연기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별개의 실체인 것처럼 분할'하여 취급하며 연기공식에 대입하여 추론식을 만들 때, 이렇게 <비현실적 가정문>이 되고 말기에 <전건부정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리처드 로빈슨이라는 미국의 불교학자가 중론의 기술 가운데에서 전건부정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용수가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며, 일본의 대 불교학자 나까무라 하지메가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의 책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연기와 중론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 못한 단지 <유명하기만 한 학자들>일 뿐입니다.

로빈슨의 The Early Madhyamika in India and China라는 '명저'에 이런 '학문적 실수'가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글수정,삭제No. 74
이 름 강병균 2005-05-14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답신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의문이 남읍니다. 교수님이 아래와 같이 쓰셨읍니다.

<중론>에서 '아뜨만이 있다면 귀를 통해 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아뜨만의 존재'를 비판하기 위한 설명이지, '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아뜨만이 있다면 귀를 통해볼 수 있어야 하는데" 라는 논법이 성립하려면 절대로 귀를 통해 볼 수가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귀를 통해 볼 수가 있다면 다른 논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용수보살의 말씀은 외도들과의 논쟁에 나오는 논법들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미리 가정하고 논법을 전개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읍니다. "아뜨만이 있다면 귀를 통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라는 논법은 속제를 이용한 논법인데 만약 신통력 역시 속제이라면 동일한 속제이기에 이근원통에 의한 신통력에 의해 귀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상기 논법에 대한 반례가 되기 때문에 용수보살의 논법은 허물어집니다. 논법은 반례가 있으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반례가 없는 논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문제를 삼는 것은 논법의 합당성이지 무아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닙니다. 즉 "아트만이 있다면 귀를 통해 볼 수가 있어야 하는데" 라는 논법이, 만약 이근원통이 가능하다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에, 부적절한 논법이라는 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73
이 름 김성철 2005-05-13
남 긴 글 ..............................
먼저 올리신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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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청목소 번역본 341페이지가 아니라 311페이지이네요.
번역문에 대한 한역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又無我無我所者。於第一義中亦不可得。
無我無我所者。能眞見諸法。
凡夫人以我我所障慧眼故。不能見實。
今聖人無我我所故。諸煩惱亦滅。
諸煩惱滅故。能見諸法實相。
內外我我所滅故諸受亦滅。
諸受滅故無量後身皆亦滅。是名說無餘涅槃。

교수님께서 올리신 질문은 첫 줄에 대한 번역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한역 원문에서도 "또 무아와 무아소라는 것도 제일의제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 문장이 실린 부분은 무아와 무아소, 즉 '자아도 없고(무아)', '눈, 귀, 코나 고, 락과 같이 자아에 소속된 것도 없다(무아소)'는 점을 가르치고 있는 부분인데, 교수님 지적하시듯이, '무아와 무아소도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아함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주로 무아를 말씀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아도 부정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답하십니다.

"내가 '자아가 있다'고 대답하면 저 사람은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자아가 없다'고 대답하면,저 사람은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여래는 상견과 단견을 떠나 중도에 의거해서 설법한다. 무명이 있음에 행이 있고, 행이 있음에 식이 있고 .... (12연기) ... 생이 있음에 노사가 있다'

따라서 무아의 가르침은 '자아, 죽 아뜨만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에 대한 대기설법으로 가르쳐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음'에 집착하면 '허무주의의 병'에 빠집니다. 무아설은 다만 비판만 할 뿐이지 무아를 주장하기 위해 설시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무아에 집착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아조차 부정하는 교설이 베풀어집니다.

이런 가르침을 갑자기 기술해 놓은 것이 좀 어색하긴 해도 불교의 궁극적 이치에 어긋나는 내용은 아닙니다.

.....................................
다음에 올리신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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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에서 '아뜨만이 있다면 귀를 통해 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아뜨만의 존재'를 비판하기 위한 설명이지, '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의 오근호용의 신통력에서 '눈으로 냄새맡고, 귀로 보기도 한다'는 성소작지는, '속제의 차원에서의 신통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아설'은 '진제 차원의 가르침입니다.' 신통력은 '속제', 무아설은 '진제'로 서로 범주가 다른 얘기이기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윤회는 속제, 무아는 진제이기에 윤회와 무아의 가르침이 모순이 아니듯이.....
 
글수정,삭제No. 72
이 름 강병균 2005-05-13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역시 중론에 대한 질문입니다.

중론에서 주장하기를 만약 아트만이 있다면 귀을 통해서도 볼 수 있을 터인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므로 아트만은 없다고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나율존자가 천안이 열려 육안이 없이도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교수님께 오래전에 질문을 드린바 교수님 답이 "깨달음을 얻으면 6근원통이 되서 가능하다" 였읍니다. 그렇다면 교수님 답은 "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는 주장이 되지 않읍니까? 이렇게 되면 중론에서 주장하는 귀를 통해서는 볼 수 없다는 주장을 뒤집게 되고 따라서 아트만을 부정하는 중론의 논리는 허물어집니다.

교수님의 설명 부탁드립니다.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71
이 름 강병균 2005-05-13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역주저서 중론(청목 석)에 대해서 질문이 있읍니다.
341쪽에 밑에서 6번째줄에 " 또 무아와 무아소라는 것도 제
1의제에서는 역시 있을 수 없다" 라고 나옵니다. 이 문장은
문장전후와 전혀 연결이 안되는 돌출문장입니다. 왜 이 문장이 거기 있어야 하는지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70
이 름 김성철 2005-05-12
남 긴 글 경주에 삼국유사 원전강독 모임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주 동국대 불자직원모임인 <문수회> 회원분들 가운데 몇 분이 관여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수회 연락처는 경주 동국대 전화교환 번호인 054-770-2114를 통해 알 수 있을 겁니다.

 
글수정,삭제No. 69
이 름 신오유 2005-05-12
남 긴 글 항상 친절하신 교수님
아직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는 군요.

울산이나 경주에 불교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불자의 모임이 있는가요?

혼자서 경전을 볼려니 힘이들고 신이 나지 않습니다.

행여나 아시면 좀 알려주십시요.
 
글수정,삭제No. 68
이 름 강병균 2005-05-04
남 긴 글 수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단기적 장기적으로 볼 수 있읍니다.

만약 우리가 윤회를 인정한다면 장구한 세월을 거쳐 수행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이생에 뿌린 수행의 씨앗은 결국 성불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재가 불자의 수행도 그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단지 이번 생의 삶만을 고려한다면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한다는 것이 문제일 수 있읍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문제는 시각과 목표를 장기적인 것에 두느냐 아니면 단기적인 것에 두느냐 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수정,삭제No. 67
이 름 2005-05-03
남 긴 글 지난 4월 29일 조계사에서 실시된 춘계불교학술대회에서 교수님의 재가불자교육의 체계화를 위한 시론에 대해 의미깊게 경청하였습니다. 재가불자 교육에 있어서 평소 막연히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하였었는데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재가불자 교육안을 통하여 구체적 문제점을 새롭게 인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불교 신행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이유중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부처나 아라한이 되는것'을 의미하기에 만일 우리(재가불자)가 '깨달음'을 얻기위해 불교신행을 한다면 대부분의 불자들은 평생을 헛물켜며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 꼴이 될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어쩌면 작금의 한국불자들의 막연한 신행생활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육은 추상적이고 막연하기 보다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교육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더욱 자신감있게 하는 기본이 될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66
이 름 김성철 2005-05-02
남 긴 글 불전 도처에서 얘기하지만, 그 근본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불전 중 <잡아함경>입니다. 이것 말고도 사람 몸 받기 힘들다는 다양한 비유가 불전 도처에 등장합니다.
왼편의 수자와 알파벳은, 이 경문이 실린 신수대장경 페이지 수와 단 수, 행 수를 의미합니다.

1. 눈먼 바다 거북의 비유

如是我聞。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
108c07║堂。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
108c08║海。有一盲龜壽無量劫。百年一出其頭。海
108c09║中有浮木。止有一孔。漂流海浪。隨風東西。
108c10║盲龜百年一出其頭。當得遇此孔不。阿難
108c11║白佛。不能。世尊。所以者何。此盲龜若至
108c12║海東。浮木隨風。或至海西。南北四維圍
108c13║遶亦爾。不必相得。佛告阿難。盲龜浮木。雖
108c14║復差違。或復相得。
(대지 전체가 바다로 변했을 때, 바다밑을 헤엄치던 눈먼 바다거북이가 100년에 한 번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그 위를 떠다니던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목이 끼는 비유)

愚癡凡夫漂流五趣。暫
108c15║復人身。甚難於彼。所以者何。彼諸衆生不
108c16║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展轉
108c17║殺害。强者陵弱。造無量惡故。
(어리석은 범부가 오취의 세계를 표류하다가 잠시 다시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 그런가? 저 중생들은 바른 이치대로 행하지 않고,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살해하고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여 무량한 악을 짓기 때문이니라)

是故。比丘。
108c18║於四聖諦當未無間等者。當勤方便。起增
108c19║上欲。學無間等。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
108c20║所說。歡喜奉行



2. 손톱 위의 먼지와 대지의 흙의 비교

114a21║(四四二)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
114a22║孤獨園。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告諸比
114a23║丘。於意云何。我爪甲上土爲多。此大地土
114a24║多。諸比丘白佛言。世尊甲上土甚少少耳。
114a25║此大地土甚多無量。乃至算數譬類不可
114a26║爲比。佛告比丘 ......

.... 114c04║如甲上土。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
114c05║中者亦如是
114c06║如大地土。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
114c07║獄者亦如是。如地獄。如是畜生餓鬼亦爾
114c08║如甲上土。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
114c09║上者亦如是
114c10║如大地土。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
114c11║獄者亦如是。如地獄。如是畜生餓鬼亦爾
114c12║如甲上土。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
114c13║中者亦如是
114c14║如大地土。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
114c15║中者亦如是。如地獄。如是畜生餓鬼亦爾
114c16║如甲上土。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
114c17║者亦如是
114c18║如大地土。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
114c19║亦如是。如地獄。畜生餓鬼亦如是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서 지옥, 축생, 아귀로 태어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지만,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는 손톱 위의 흙(爪甲上土)과 같이 적다는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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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착하게 살지 않는 이유>는 내생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반을 <사라짐>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체개고의 진리, 즉 고성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세계는 무시무시합니다. 비정합니다.
그리고 세끼 밥 잘 먹고 밤에 편히 잘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은 윤회의 세계에서 최상위 중의 상위에 위치한 희소한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문명사회에서 사는 것 자체가 사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명사회는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건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계장, 도축장, 실험동물의 살해 등등....

이를 망각하기에, 우리 대부분은 '내생에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려니' 하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럴 리는 없습니다.
윤회의 법칙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서구인들에 의해 이룩된 현대문명은
생명의 세계에서 거꾸로 가는 열차입니다.



 
글수정,삭제No. 65
이 름 신오유 2005-05-02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께

꽃비가 하늘 가득히 내렸던 일요일이었습니다.
장엄한 화엄의 세계입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서
맨 먼저 뱉는 말을 관찰해 보아ㅆ습니다.

아-죽겠다(아마도 이말은 아침이라 뻐근하다)

경전에서 지적하신 대로,우리 인간의 몸을 받기란 거의 확률이 희박한데,우리는 함부로 먹고,함부로 살고,함부로 사유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물의 평등함을 관찰하고,3독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관과 자비관과 연기관을 습관화하여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친절하신 교수님,

전생에 인간이였던자,다음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자는 거의없는 윤회의 비정함을 말씀하셨는 데 이 구절은 어느 경전에서 확인 할 수 있을까요?
왜냐면,저또한 有愛의 습기가 많았었는 데,이 구절은 좀 확실하게 관찰하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도업스님의 화엄경을 강의 받고 있답니다.
정말 대단한 재발견이 아닐 수없습니다.
화엄사상은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미진의 먼지에서 더 나아가 우주를 관찰할 사상적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64
이 름 김성철 2005-04-22
남 긴 글 혹시나 해서 한 마디 더 올립니다.

사라지는 것이 불교수행의 목표라고 하면 불교신자들도 대부분 도망가겠지요.

웬만한 사람은 불교 수행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에...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도 희망을 심어 줄 수 있는 얘기를 한 마디 더 적습니다.

열반을 추구하다가, 살짝 실수하면 내생에 '엄청난 존재'로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륜성왕이 되든지, 엄청난 천신이 되든지...

혹 열반이 무섭다고 느껴지면 열반을 추구하며 열심히 고결하게 수행하다가 살짝 번뇌를 내면 됩니다.

그러면 전륜성왕과 같은 황제나, 천신이 됩니다.

밑져도 이렇게 본전 이상의 소득이 있기 때문에, 세속적 복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불교수행은 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 '무한히 윤회해야만 하는 숙명'을 벗어던지고,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아주 드문 성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위대한 인격자인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입니다.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졌을 때, '긴 긴 윤회의 밤을 끝내고 이제 편히 쉴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나는 사람은 불교 수행을 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글수정,삭제No. 63
이 름 김성철 2005-04-22
남 긴 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무여의열반에 들면 사라집니다.
불교초심자나 세속적 욕망이 강한 사람에게 불교의 열반이 '사라짐'이라고 말하면 기겁을 하겠지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설법을 주저한 이유는, 애욕에 물든 중생들이 그 법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애욕 중에는 유애(有愛)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또 태어나고 싶은 욕망'입니다. 색계나 무색계 중생의 경우, 성욕, 재물욕, 수면욕, 식욕, 명예욕 등 오욕락에 대한 욕망인 욕애는 끊었으나, 아직 '유애'는 남아 있기에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말해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고 색계나 무색계에 집착해서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욕망 가운데 유애와 반대로 무유애(無有愛)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자살해서 사라지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열반이 '사라짐'이긴 하지만, 이런 무유애와는 다릅니다.

무유애는 사업실패나 실연 등의 '상대적인 고통'으로 인해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고 열반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고통임(일체개고)을 자각하여 사라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고성제에 대한 자각이 깊은 사람만이 열반을 진심으로 희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속에 빠져 사는 일반인들은 이런 열반이 불교의 목표라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전 인류,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죽으면 반드시 태어나며, 지긋지긋하게 태어나며, 다시 태어날 경우 인간이나 천신으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을 철저히 자각할 때, 비로소 열반을 희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 전 인류 중 전생에 인간이었던 자는 거의 없고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자는 거의 없다는 '윤회의 비정함'을 자각할 때 열반하고 싶은 마음이 납니다.

눈먼 거북이 비유, 손톱 위의 먼지와 대지의 흙의 비교 등(잡아함경)에서 보듯이 생명의 세계에서 인간은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 몸 받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하늘나라도 수천억번 가 보았고, 지옥도 수천억번 가 보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윤회의 세계 자체가 지긋지긋해집니다.

그래서 열반을 추구하게 됩니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유애의 사라짐은 검정색이고 열반의 사라짐은 무지개빛 총천연색, 더 나아가 모든 색깔이 혼합된 밝은 순 백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여의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성자인 아라한이 되면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데, 이는 아함경 도처에서 발견되는 아라한의 정형구입니다.

아생이진(我生已盡) 나의 생은 다 끝났다.
범행이립(梵行已立) 고결한 행은 완성되었고
소작이작(所作已辦) 할 일을 다 마쳤기에
자지불수후유(自知不受後有) 다시 삶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이런 자각을 해탈지견(解脫智見, 또는 解脫知見)이라고 부릅니다. 유여의열반의 상태에서 생긴 자각이지요.

예불문에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고 읊으며 부처님(초기불전의 아라한)의 다섯 가지 공덕에 대해 향을 사루어 올리는데, 여기서 말하는 해탈지견이 바로 위와 같은 자각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과 '선의 깨들음 - 그 정체와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상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본 홈페이지 문서자료 가운데 33번과 39번입니다.

그렇다면, 무여의열반에 든 자는 돌아오지 않는데, 천태지자 대사의 일화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는 법신불의 얘기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신'이라고 하면, 이 세상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연기법'이라고 풀이하는데, <대지도론>에서는 '인격화된 보신' 역시 법신이라고 부릅니다.

후대의 유식불교에서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三身)을 말하지만, 반야계 주석서인 <대지도론>에서는 법신과 화신의 이신(二身)만을 말하며 법신에 보신의 의미를 포함시킵니다.

제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천태대사의 일화'를 정확히 알지 못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풀이할 수는 없지만, 천태대사는 <대지도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신의 교학을 완성한 분이기에, 아마 <대지도론>적인 보신불의 설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됩니다.

무여의열반에 든 화신 부처님은 설법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보현행원품에 보면 '타방 부처님들께 열반에 들지 말고 법을 설해 달라는 기도'를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릴 수 있지만, 이는 모두 아직 살아 계신 타방 부처님들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나, 약사여래와 같은...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기도에 감응하시는 부처님은 모두 타방부처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경우는 아직 부처가 아니며,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지자대사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 그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 등을 통해서 ...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 등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런 분들은 '보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지금도 부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은 법신불에 대한 얘기입니다.

들리는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음성이요, 보이는 모습은 모두 부처님의 육신이라고 할 때의 부처님은 법신불입니다.

화엄경의 부처님이, 바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수백억겁 전 '대위광태자'라는 왕자가 서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닦아 부처가 되면서 그 서원에 따라 그 몸이 온 우주로 변합니다.

우리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 속 털 구멍 정도의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손오공의 내기에서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 글을 쓰고 내려왔다'는 <서유기>의 얘기는 비로자나부처님, 법신불에 대한 얘기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법신불의 몸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는 도처에서 법신불이 설법하는 것으로 설계가 되어 있기에 그 어떤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과거 선사스님들이 '돌멩이가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법신불의 설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스토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자연에서 추출한 불교적 신화'라고 볼 수 있지만, 화엄신화는 그 스케일이 엄청납니다.

다른 그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종교신화입니다.

석가모시 부처님께서 대기설법, 응병여약의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셨듯이, 화엄경, 법화경 등등 대승불전의 방편 신화는 우리를 강력하게 변화시킵니다.
보살의 삶을 살도록...

화엄신화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문서자료 가운데 36번 <화엄사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62
이 름 강병균 2005-04-22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설명 감사합니다.

수행자가 무여의열반이 어떤 것인지 미리 체험하기 위해서 멸진정에 드는 것이라면 무여의열반에 드는 경우 다시는 돌아오는 일이 없지 않읍니까? 만약 돌아올 수 있다면 무여의열반에 들기전에 미리 나는 10년후에 무여의열반에서 돌아올 것이다라고 서원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경우 멸진정과 다를 것이 없읍니다. 무여의열반에 드는 경우 절대 돌아올 수 없다면 오래전에 무여의열반에 드신 부처님으로부터 관정수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의 주장은 무었인지요? 천태지자대사가 아직도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대중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떻게 해설해야 하는지요? 이 일로 증거로 삼아 부처님은 여전히 삼계 사생의 중생을 위하여 활동하고 계시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읍니다.무착문희는 문수도 주걱으로 때려 쫓았다는데 지자대사의 일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61
이 름 김성철 2005-04-21
남 긴 글 <청정도론>에서 수행자가 멸진정에 드는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선, 번뇌를 제거하는 보조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는 불환과의 성자에 해당하는 얘기이겠지요.

그리고 아라한의 경우에는, 사후(死後)에 무여의열반에 들어갔을 때,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미리 체험하기 위해서 멸진정에 들어가 본다고 설명합니다.
'일체개고'라는 가르침이 있지요.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고성제'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수행자가 열반을 추구하는 이유는 윤회하는 삶 자체가 고이기 때문입니다.
내생에 짐승이나 아귀, 지옥중생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천신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 고(苦)임을 자각하는 것이 '고성제'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를 철저히 알 때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하게 됩니다.

멸진정에 들어갈 경우 아직 사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1.미세번뇌를 없애기 위해, 2.무여의열반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 위해 멸진정에 든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하늘나라의 고통에 대해서는 용수보살의 '권계왕송'(<용수의 대승사상>, 동봉스님 번역, 진영사 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티베트의 쫑카빠(1357-1419) 스님의 <보리도차제론>에도 그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글수정,삭제No. 60
이 름 강병균 2005-04-21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설명 감사합니다.

수행자가 멸진정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멸진정에 들어가면 모든 감각이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진다
는데 무엇을 얻고자 멸진정에 드는지요?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드는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기한을 정하고 멸진정에 든다면 멸진정에 드는 목적이 있을 것이고 유익한 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강병균 드림.
 
글수정,삭제No. 59
이 름 김성철 2005-04-21
남 긴 글 처음 들어봅니다
제도권 내의 불교학자는 아니신 것 같은데요....
 
글수정,삭제No. 58
이 름 신 오유 2005-04-20
남 긴 글 어떠한 질문도 조화롭게 최선을 다하시는 자비로운 김성철 선생님.저는 요즘 신용국님의 (인드라망의 세계)와 (실천불교)를 읽습니다.그 분은 보기 드물게 우수한 불교학자이며 수행자인 듯합니다.화엄의 연기,유식,정토사상중 주로 연기을 중심으로 과학과 자연과 인간을 결부시켜 풀어나가는 흠잡을 데가 없는 양서였습니다.
혹시 신용국선생을 아시는지요?
 
글수정,삭제No. 57
이 름 김성철 2005-04-20
남 긴 글 멸진정이 소재가 되었기에, 저도 공부할 겸 해서 어제 저녁에 붓다고샤의 <청정도론>과 <아함경>, <구사론> 등에 실린 멸진정에 대한 설명을 뒤져 보았습다.

<아함경>이나 <청정도론> 모두, '멸진정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아라한이나 불환과에 오른 성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불환과는 아라한 바로 아래 단계의 성자입니다.
죽은 후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 이상에서 아라한이 되는 성자입니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다(불환)이라고 부릅니다. 불환과의 성자도, 언제 열반에 드는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멸진정은 아무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상태이지만, 멸진정에 들어간 수좌의 경우 그 체온이 남아 있고, 목숨이 남아 있고, 감각기관이 썩지 않았기에 시체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이 역시 아함경과 구사론, 청정도론의 설명이 일치합니다.

멸진정에 든 사람에게는 그 어떤 재난도 닥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멸진정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주변의 생활용구들이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들어가기에 화재가 나도 그 옷가지와 생활용구 등은 불에 타지 않고 온전하다고 합니다.(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3, pp.415~416, 초기불전연구원 간)
따라서 멸진정에 들어간 성자에게 전신마취를 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동물적인 감각문화, 감각문명이 판을 치는 현재의 지구상에서 멸진정에 들 수 있는 성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교수님 질문 올리신 덕분에 저 역시 멸진정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56
이 름 김성철 2005-04-18
남 긴 글 강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올리셨습니다.
부처님이 계시거나, 삼매수행 중에 마취 당한 수좌가 계시다면 답이 간단히 나올 텐데...
어쨌든 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추측해 보겠습니다.

마취를 하게 되면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이 차단되지요.
자의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고, 외부의 감각도 느끼지 못합니다.
국소마취의 경우는 마취된 손이나 발을 내가 보고 있기에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전신마취의 경우는 모든 지각기관이 차단되기에 그 동안 나의 자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깨어난 후 회상을 해 보면, 마취과의사가 '가스 마스크'로 입을 덮었던 것만 생각납니다.
깨어날 때에도 꿈에서 깨는 것과 달리 별 기억이 없이 갑자기 깨어나더군요(저는 전신마취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하는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꿈 없는 잠의 상태에서 나는 어디에 있었나?'라든지, 식물인간으로 몇 달을 지낸 사람이 깨어난 후 그 동안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을 알고, '그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이 중에 '꿈 없는 잠의 상태에서 나는 어디에 있었나?'라는 질문은 선가에서 화두로 사용됩니다.
이에 대한 답은 '꿈 없는 잠은 없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깨치는 것은, 화두로 사용된 의문 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는 '화두타파의 비법'은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깊은 전신마취상태에 들었다가 깨어날 때 마취된 동안 꾸었던 꿈의 내용이 전혀 회상되지는 않지만, 마취된 상태에서 매 순간 순간 그 당사자에게는 계속 어떤 영상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기 때문에 꿈의 실마리를 놓쳐서 전혀 회상이 안 되는 것일 뿐입니다.
잠잘 때의 꿈도 마찬가집니다.
깊은 잠에서 깰 때 간혹 '꿈도 없이 잘 잤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꿈 없는 잠'은 없습니다.
다만 회상이 안 될 뿐입니다.
현대의학에서는 R.E.M(Rapid Eye Movement) 상태에서만 꿈을 꾸고 그 이외의 상태에서는 꿈이 없다고 합니다.
R.E.M이란 잠자는 사람의 눈동자가 눈꺼풀 속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 때 그를 깨워보면 구체적인 꿈을 기억해 내고 그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러나 R.E.M.상태가 아닐 때에 그를 깨우면 꿈을 꾸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R.E.M.상태에서만 꿈을 꾼다'고 현대의 의학자들이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R.E.M.상태는 '바둑이와 논다'든지, '밥을 먹는다'는 식으로 구상적이고 구체적인 꿈을 꾸는 시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꿈 중에는 추상적 꿈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눈을 감으면 앞이 컴컴해지는데 자세히 보면 마치 추상화와 같이 시야가 울긋불긋하기도 하고 무엇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꿈 중에는 이런 식의 추상적인 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날 때에는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각성시의 구상적 세계와 대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 없이 잘 잤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잠을 잘 때, 내내 꿈을 꾸지만, 아침에 기억나는 것은 깨어나기 10초 정도 이내에 꾸었던 꿈뿐입니다.
'꿈이 회상이 되지 않는 것'은 '꿈이 없는 잠'과는 다릅니다.
자는 사람의 의식에는 항상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식물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의 뇌파가 정지하지 않은 이상 그의 의식에는 계속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
** (뇌파가 정지한 상태를 <뇌사>라고 하지요.
이 때는 중음신[귀신, 영혼]이 육체에서 이미 떠나간 다음이기에 고기덩어리일 뿐입니다.
심장만 기계적으로 뛰는 상태이며, 심장 역시 몇 시간 후 반드시 멈춥니다.
그래서 이 때 장기를 채취하여 다른 환자에게 이식합니다.
중음신이 떠나가면 우리의 육신은 빛을 잃어버립니다.
시체가 되는 것이지요.
중음신 역시 5온을 갖추는데 우리 몸에서 중음신의 색온인 '빛과 같은 색온'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빛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생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단명하거나 병이 많은 과보도 받지만 그가 쓰는 물건의 빛깔이 좋지 않은 과보도 받는다고 합니다.
살생을 통해 남의 몸의 빛깔을 퇴색시켰기 때문에...)
-----------

뇌파가 작동하는 이상 그의 의식에는 계속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다만 깨어난 후 그것이 모두 기억나지 않기에 '그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의아해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깊은 선정'에 든 수좌에게 마취제를 투여하는 상황에 대비하면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정은 초선에서 제4선까지 또, 공무변처정에서 비상비비상처를 넘어 멸진정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많기에 '깊은 선정'의 상황 전체에 대한 단일한 답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강 교수님께서 '멸진정'으로 한정하셨기에 그에 대해 답해 보겠습니다.

'멸진정'을 '상수멸정(想受滅定)'이라고도 부릅니다.
생각(想)과 느낌(受)이 모두 사라진(滅) 삼매(定)의 상태이지요.
멸진정과 열반은 다릅니다.
열반은 삼매(定)와 함께 완전한 지혜(慧)를 갖춘 깨달음의 상태이지만, 멸진정은 모든 생각과 감각이 끊어진 삼매의 상태일 뿐입니다.
전신마취가 되든 되지 않든 원래 '아무 느낌도 생각도 없는 상태'가 멸진정의 상태이기에 전신마취를 해도 그 수좌의 의식에는 어떤 느낌도 생각도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다만 멸진정에서 깨어나 일어나려고 할 때 몸에 아직 마취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일어나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그 수좌의 의식에서는 일어나겠다는 생각은 떠올라 있을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다른 선정의 경우 선정에서 깨어날 때 스스로 깨어나겠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멸진정의 경우는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이기에 깨어나겠다는 생각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멸진정에 들어간 자는 결코 깨어날 수 없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멸진정에 들어가기 전에 '24시간 후에 깨어나겠다'든지, '7일 후에 깨어나겠다'고 작정을 하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자명종을 깨어날 시간에 맞추어 놓고 자는 것고 비슷합니다.

멸진정은 '1.초선, 2.제2선, ... , 7.무소유처삼매, 8.비상비비상처삼매, 9.멸진정'의 9차제정 가운데 가장 닦기 힘들고 미세한 선정으로 번뇌를 제거하는 보조수단으로 개발된 선정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아니지요.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삼매에 든 수좌에게 마취제를 투여하는 경우 그 수좌의 의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그 수좌가 어떤 삼매의 경지에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멸진정의 경우는 위와 같이 답할 수 있으나, 예를 들어 초선에 든 수좌의 경우는 그 초선의 경지가 흐트러질 겁니다. 몸도 관여하는 색계의 선이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제4선의 경우도 아직 몸이 남아 있는 색계의 선이기 때문에 마취제에 의해 그 경지가 흐트러질 겁니다.
몸도 색법(물질)이고 마취제도 색법(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 등의 무색계 삼매에 든 수좌의 경우는 마취제를 투여해도 그 경지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무색계 삼매는 몸과 무관한 정신적 삼매이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삼매에서 깨어나려고 할 때, 마취제가 투여된 상태이기에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무색계 삼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마치 꿈 속에서 우리가 갖가지 영상을 볼 때 그 꿈에 반응하듯이, 갖가지 생각이 나타나는 상태에 있다가, 나중에 마취가 풀리면 잠에서 깨듯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게 될 겁니다.
이상은 제가 이해한 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한 추측일 뿐입니다.
부처님께 여쭈어 보든지, 삼매의 상태에서 마취 당한 수좌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답이 나오겠지요.

강교수님께서 참으로 난감한 질문을 올리셨지만, 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머리 굴려서 품을 수 있는 모든 의문을 품어 보아야 하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얘기 드리면, '깨어서 생활한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엄밀히 보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전의 일만 정확히 기억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침에 깨어날 때 방금 전의 꿈만 기억나듯이.... 지금 저녁이 된 이 순간에는 아침에 있었던 일, 새벽에 있었던 일등의 대부분은 망각되었지요. 마치 저녁에 잠들며 꾸었을 꿈을 아침에 깨어날 때 망각하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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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55
이 름 강병균 2005-04-18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요즈음은 무척 바쁘시지요?
재미있는 질문을 드립니다.

선방에서 깊은 선정(멸진정)에 들어있는 수좌에게 몰래 다가가서
마취제를 다량 투입하여 마취를 시키면 그 수좌의 의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강병균드림.
 
글수정,삭제No. 54
이 름 2005-04-15
전자우편 hg9984@hanmail.com
남 긴 글 교수님!
전 요즘 교수님 홈에 들어가는 큰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이곳에는 향기가 납니다.
이 향기가 그리워 다시 오고 싶어집니다.
고맙습니다.
 
글수정,삭제No. 53
이 름 김성철 2005-03-25
남 긴 글 미안합니다.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책에 님께서 원하는 정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상 -
 
글수정,삭제No. 52
이 름 문우일 2005-03-25
남 긴 글 아래에서 언급한 설화입니다:

THE STORY OF TWO LOVERS - a story from the Buddhist Sutra.


This is a dramatic love story from the Buddhist Sutra. It is fairly lengthy and therefore sub-divided into several ACTS.



ACT I - Magic Pearl from the Dragon King of Ocean


Once upon a time, an Indian King had two sons. One of them was very kind and compassionate, and the other was very mean and evil. For simplicity, we will call them the Good Heart Prince and the Evil Heart Prince respectively.


One day, the King summoned them to the Imperial Court and said, "The welfare of my subjects is very important, and my government had been helping the poor people of this country. But now my treasury is almost empty and so I want you to go to see the Dragon King (God of the Ocean) and ask for help. Once you went to the ocean shore, you recite a mantra given to me by a Hermit yesterday. Then the Dragon King will come out to greet you and give you a precious pearl. Bring it home and put it in my treasury because it will bring prosperity to my kingdom and my people."


The two brothers accepted the mission and off they went to the shore of the Indian Ocean. They did exactly what was told and, after reciting the mantra, the Dragon King came out of the Indian Ocean and asked what they want.


After listening to their request, the God of Indian Ocean said, "since your Royal Father had such a noble cause, I will help you out. Take this magic pearl back to your palace. It will ensure your Kingdom's prosperity as long as you take good care of your subjects." Happily the two brothers accepted the gift and left for home.


ACT II - The Fight between the Two Princes


As the two brothers traveled along a road on the way home, a greedy thought suddenly came to the mind of the Evil Heart Prince. "Why not get the magic precious pearl all for myself? After my father's death, I will be the King of the richest kingdom on earth!" So, he drew his sword and tried to kill his brother.


But, of course, the Good Heart Prince refused to give it up without resistance, and soon it developed into a big fight. Unfortunately, after a whole day's fight, the Good Heart Prince suffered serious injuries and collapsed by the road side. The Evil Heart Prince took the pearl, returned to the Palace, and reported to his father that they had encountered some rebellious gangs on the way. He told his father that his brother was killed in a battle. The King was of course very mournful upon hearing the death of his son.


ACT III - Escaped to the Neighborhood Kingdom


Back to the crime scene, some Buddhist Monks was walking by when they spotted the badly wounded Good Heart Prince laying by the road side. They took him back to their temple and tended his wounds. Several months had passed, the Good Heart Prince was getting better, except for his eye sight - his eyes were injured so badly that he was now blind.

By now, the Monks learned of his identity and decided that it was not safe for the Prince to stay here, because the Evil Heart Prince always wanted to kill him. So they took him to a Monastery in the neighbourhood Kingdom to continued to take care of him.


Several years had passed and the Prince was fully recovered, except for his eyesight. However, during the time he stayed in the Monastery, he learned how to play various musical instruments and was able to play very good sensational songs. During all these year, he had hided his identity for fear of being assassinated by his brother.


One day, the King of the neighbourhood kingdom was looking for a gardener-musician for the garden inside the Royal Palace. The Monk-in-Charge thought, "this is a good place for Good Heart Prince to be in. He will be very safe inside the Royal Palace." So, he recommended the Prince to the King for the job. After an audition, the King immediately offered him the job, without knowing that he was in fact the Prince was his Neighbour



Act IV - Prince and Princess Fallen in Love


The Good Heart Prince, now just an ordinary gardener, did a very good job at the Royal Palace. He tended the plants of the Royal Palace really well and he played good music for the Royal family. But still, he hided his identity and everyone in the Palace thought that he was just an orphan grown up in a Buddhist Monastery.


One beautiful evening, the King's Daughter took a walk in the garden and heard a very beautiful song played by somebody in the garden. The Princess was so attracted to the music that she went to find out who the musician was. As soon as the two young people met, they seemed to know each other from previous lives and they immediately fell in love with each other. The Princess went to the Royal Garden every day to talk to the blind gardener and listen to his music. After a while, they fell in love so madly with each other that the young Princess went to see her father to ask permission to get married.


"What!?" the King was shook at the proposal and opposed to the marriage. "You are a Royal Princess and he is just an ordinary blind gardener from a lower class!" During ancient India, marriage across classes was unknown.


"But I love him. If you do not allow me to marry him, I will die of heartbreaking," said the Princess, crying.


"No way." replied the stubborn King. "When you were young, I had promised to marry you to the Good Heart Prince of our Neighbourhood Kingdom. You should be married to another Royal Family, not to an ordinary worker. Your proposal cannot be accepted!"


"How can I get married to Good Heart Prince?" protested the Princess. "The Prince had not been found for many years. I love him, even though he is just an ordinary blind-gardener musician. Please, father, give us permission to get married!"


Act V - A Miracle Performed by the King of Gods


By this time, the blind gardener stepped forward to reveal his identity and told them he was the Good Heart Prince and that he was escaping from his brother, the Evil Heart Prince. The Princess jumped for joy on hearing that her fiancé was right there in front of her. The King, however, was skeptical, "How can you prove that you are in fact Good Heart Prince?"


"I will swear to the King of Heaven and Gods that if I am telling the truth, my eyesight will be restored. If not, then I will be blind forever." said the gardener.


Emperor Sakra, the King of Gods, listening to the conservation, was so moved by the gardener that he appeared before the young couple. He told everybody, "You are right, young Prince. You are indeed the Good Heart Prince and you two have the same karma in your previous lives so that you are destined to be happily married couple." Then the King of Heaven performed a miracle and restored the eyesight of the young prince completely.


Act VI - A Happy Ending

The wedding ceremony was of course magnificent. The embassador from the Neighourhood Kingdom was invited. And the whole nation had a good time.


After the wedding, the couple returned to their home country with a fleet of servants and guards carried by a herd of elephants. The Evil Heart Prince - I do not know what happened to him - Some said that he was punished and served a jail sentence. Others said that after the Good Heart Prince pardoned his crime, he was so moved that he became a devout follower of the Lord Buddha.

 
글수정,삭제No. 51
이 름 문우일 2005-03-25
홈페이지 http://http://cafe.naver.com/philae
전자우편 woeil1004@yahoo.co.kr
남 긴 글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클레어몬트 종교학부 박사과정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는 문우일입니다.

초대 기독교 문서 가운데 하나인 The Acts of Thomas 9행전에 보면 "진주 찬양시"가 나오는데요, 동방의 어린 왕자가 바다에서 용이 지키고 있는 진주를 찾으러 이집트에 가서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주를 찾아 돌아와 어른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어떤 사이트에서 비슷한 불교 설화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운영자에게 물으니 그 불교 설화를 팔만대장경에서 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진현종 님의 '한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을 주문해서 읽어보니, 진현종님 책이 완역이 아니라서 그 설화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그 설화가 팔만대장경 어디쯤에 나오는지, 그 설화의 연대가 언제인지 아시면 꼭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는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몇 세기에 쓰인 어떤 책인지요? 오비드(1세기 로마 문학가) 책을 읽으니 기원전 1세기부터 브라만 승려들이 지중해 연안 소국들에 와서 불교를 전파했고, 소국의 왕과 왕자들이 브라만 승려에게 사사받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에 불교 승려들이 다녀갔고 예수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수 말씀의 골자인 산상수훈이 법화경 사상과 비슷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제는 대승불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준 건지 아니면 기독교 영향을 대승불교가 받은 건지 하는 건데요, 대승 경전들이 일러봤자 2세기여서 마태복음 1세기보다 뒤진다는 데 제 연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이른 시기의 대승 경전을 읽어볼 방법이 있으면 꼭 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올립니다.

 
글수정,삭제No. 50
이 름 오유 2005-03-24
남 긴 글 항상 침절하신 안내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글수정,삭제No. 49
이 름 김성철 2005-03-22
남 긴 글 이번 학기 대학원 강의가 없어서 뵙지 못하네요.
CD를 넣은 후 신수대장경을 클릭하면 <신수대장경 목록>이라는 이름의 한글 파일이 뜹니다.
그 후 한글 프로그램 메뉴에서 <편집> - <찾기> 를 클릭하여 창이 뜨면 '唯識'이라는 한자를 써 넣은 후 검색하면 '唯識'자가 붙은 경전이 하나하나 모두 찾아집니다.
그 가운데 유식삼십송을 찾아 왼쪽의 권수, 또는 경전 번호를 확인한 후 <유가부>로 들어가 그 번호에 해당하는 경전을 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구절 역시 한글 프로그램의 <편집> - <찾기> 기능을 이용해 찾은 후, 블럭 설정한 후 마우스로 복사한 다음 내가 작성 중인 문서에 <붙여넣기>를 하면 됩니다.
한자 단어를 <찾기>로 찾을 때 잘 안 찾아지면 우리말 음가를 모두 한자로 변환한 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노인'을 찾고자 한다면 '노인'을 한자로 변환시켜 보면 되지만, 잘 안 될 경우 '로인'을 한자로 변환한 후 찾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 유(流)와 류(流), 이(利)와 리(利) 등등 우리말 음가가 여럿 있는 한자어는 그 음가로 적은 다음에 다시 한자 변환하여 찾아야 합니다.
 
글수정,삭제No. 48
이 름 오유 2005-03-22
남 긴 글 교수님 안녕하시죠?

나누어 주신 신수대장경 CD DISKET의 사용방법을 잘 몰라 문의 드립니다.수업시간에 설명을 하셨는데 불구하고
다시 문의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예)세친의 유식 30송을 찿고싶다면 ?

그리고 한 구절을 복사하여 인용할 경우 ?
또한 한 단어를 찿을 경우 ?

바쁘신데 짐을 드리는 것같아 죄송합니다.

오유 올림
 
글수정,삭제No. 47
이 름 김성철 2005-03-17
남 긴 글 제가 갖고 있는 법요집에도 "화탕자소멸 지옥자고갈"이라고 쓰여져 있네요.
교수님 말씀대로, "화탕은 고갈되고 지옥은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천수경을 보면서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입니다.

반야심경의 경우 '색즉시공'을 우리말로 풀어서 독송할 때, 옛날에는 '물질이 허공이요..."라고 했는데, 산스끄리뜨어에서 '공(슈냐)'과 '허공(아까샤)'은 전혀 다른 단어이기에 요즘에는 "물질이 곧 공이요..."라고 고쳐서 독송합니다.

그러나 천수경의 경우는 다라니를 제외하고는, 그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문이 없기에 그것을 수정해서 독송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천수경이 편집된 시기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합니다.

'화탕자고갈'이라고 하든 '화탕자소멸'이라고 하든 그 뜻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과 같이, 모든 불교경전들을 그 맥락을 살피며 세심하게 분석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앞으로 불교학자들의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46
이 름 강병균 2005-03-17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천수경에 말입니다. 제가 가진 천수경에 말입니다."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말은 "아약향화탕 화탕자고갈 아약향지옥 지옥자소멸"이 잘못 쓰여진 것이 아닙니까? 화탕은 "고갈"이고 지옥은 "소멸"이라야 말이 맞지 않읍니까? 인터넽으로 이리 저리 찾아 보아도 "화탕소멸 지옥고갈"로 나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읍니다. 교수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45
이 름 김성철 2005-03-14
남 긴 글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부처가 될 경우에 우리의 총8식(識)이 모두 지(智)로 변한다고 합니다.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 식을 전환하여 지를 얻는다)라고 부릅니다.
제8 아뢰야식은 큰 거울과 같이 모든 것을 비추는 대원경지로 변하고,
제7식 마나식은 나와 남을 구분치 않는 평등성지로 변하며,
제6식은 신묘한 분별력을 발휘하는 묘관찰지로 변하며,
전5식은 신통력을 갖춘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前)오식은 안, 이, 비, 설, 신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식학의 전범(典範)인 <성유식론>에서는 이런 성소작지에 대해 "오근(五根)을 호용(互用)하는 경지"라고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눈은 보고, 귀는 듣는 데 쓰는 것이지만, 성소작지의 경지를 터득하면, 눈으로 듣고, 귀로 맛보고, 혀로 보기도 하는 등 오근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근을 호용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 책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 가운데 "오근호용종"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전거를 적어 놓긴 했습니다.

따라서 아나율 존자의 "천안(天眼)"이란, 안근으로 세상을 보는 감각이 아니라, 감각기관의 구분을 초월한 성소작지와 같은 지각능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색을 보는 눈의 망막은 '예민한 피부"라고 볼 수 있고, 촉감을 느끼는 신체는 "거친 망막'과 같다고 볼 수 있기에, 오감 각각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글수정,삭제No. 44
이 름 강병균 2005-03-14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바쁘신 와중에도 항상 친절하게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법에 의하면 아란 5온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본다는 것은 안경 안근 안식의 삼자의 연기관계에 의하여 발생한다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제자 아나율존자는 지나친 수행으로 의하여 두 눈을 멀게 되었지만 천안을 얻어 육안으로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합니다. 이 경우 아나율존자의 안근은 이미 파괴되어 없을진데 도대체 어떤 안근이 아나율존자에게 존재하는 것입니까? 만약 육신이외의 안근이 존재한다면 이는 안근의 자성을 의미하게 되지 않읍니까?

 
글수정,삭제No. 43
이 름 김성철 2005-03-12
남 긴 글 강교수님께서 정토신앙의 교학적 근거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저 역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불교교학의 일미성(一味性)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토신앙의 경우 많은 학자들이 불교의 근본성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교의 인과응보 교리 가운데 정토신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과응보라고 말할 때 선인락과 악인고과의 인과응보를 얘기합니다.
착하게 살면 그에 부응하는 즐거운 과보를 받게 되고 악하게 살면 그에 부응하는 괴로운 과보를 받는 다는 인과응보설이지요.
이런 인과응보를 이숙인(異熟因) 이숙과의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원인과 다르게 결과가 익었다는 뜻입니다.
선, 악, 무기(無記)의 삼성(三性) 가운데 원인은 선(善)과 악(惡)인데 과보는 무기성(선도 악도 아닌 것)인 고락이기 때문에 이숙(다르게 익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선악은 짓는 것이지만, 고락은 받는 것이기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악한 것이거나 선한 것일 수 없습니다.
범주가 다른 얘기지요.
그래서 무기성입니다.

그런데 인과응보에 아주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응보입니다.
'착하게 살면 내생에도 그 착한 성품이 유지되고, 악하게 살면 내생에도 그 악한 성품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동류인(同類因) 등류과(等流果)의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같은 종류의 인을 지으면 같은 흐름의 과보가 생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본생담의 경우 대부분의 일화가 이런 동류인 등류과의 인과응보와 관계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정토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16관법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류인 등류과의 인과응보에 근거한 수행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토의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수행을 자꾸하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죽은 다음에도 그런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같은 종류의 인(因)이 같은 흐름의 과(果)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 정토의 모습을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나라로 그리는 것도 같은 이치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량수경을 자꾸 되풀이해서 읽으며 정토의 모습을 떠올릴 경우 내생에 그런 모습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토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아직 더 찾아보고 정리해야 할 생각이지만, 말씀이 나온 김에 제 생각을 소개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42
이 름 강병균 2005-03-11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권순애님께

다들 부처가 되는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거쳐할 할 길은 빠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멀기만한 길입니다. 그래서 정토신앙도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정토신앙이 왕성했읍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지요. 정토신앙에서의 정토의 존재를 확신시켜주는 데 있어서 교학이 중요합니다. 이러 이러한 이유로 정토가 존재하며, 정토의 존재는 기존 불교교리와 위배가 되지 않는다 것을 교학의 힘을 빌어 설명할 수 있을 때 그 신앙이 굳건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상좌불교의 가르침에는 서방정토가 등장하지 않읍니다. 대승불교에만 등장하며 따라서 해당경전도 대승불교에만 있읍니다. 대승불교에서 정토의 존재이유를 교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그 존재근거는 위태롭기 그지 없을 것 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41
이 름 강병균 2005-03-11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답 감사합니다.
교수님 말씀처럼 교학적인 답을 원합니다.설사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답이 다를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향곡스님은 숙면일여경지에 대해 의심해하는 말을 성철스님에게 한적이 있읍니다. 성철스님 말씀에 의하면 운허스님은 윤회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운허 스님은 윤회란 방편설이라고 믿었다 합니다.
 
글수정,삭제No. 40
이 름 김성철 2005-03-11
남 긴 글 권순애님 말씀처럼, 불교의 여러 가르침이 상징인지, 사실인지, 교리적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겁니다.
교학자는 교리적 문제에 대해 과거의 경전과 논서에 의거해 답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래에 올린 제 답변들은 제 체험에 입각한 얘기가 아니라 교학에 근거한 저의 해석일 뿐입니다.
강교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답변 역시 저의 체험이 아니라 교학적 답변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강교수님 질문에 대해 답을 해 보겠습니다.
무색계의 4천이 의미의 세계인지, 존재의 세계인지 물으셨는데, 무색계 4천은 모두 '삼매의 경지'입니다.
욕계인 이곳과 비교하면 '삼매의 황홀경'이라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자체에서 다양한 의미는 발생할 수 없을 겁니다.
계속 황홀한 한 가지 삼매의 경지만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라고 규정할 때, 무색계는 물질(색)의 세계가 아니기에 의미의 세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꿈이나 극락정토에서와 같이 다양한 의미가 발생하는 의미의 세계가 아니라, "삼매의 황홀경"이라는 하나의 의미만 계속되는 "의미의 세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다.

욕계와 색계는 그것이 있는 장소도 있고 방위도 갖지만, 무색계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기에 그것이 있는 공간적 좌표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 삼매만 추구하다 어떤 경지를 성취한 사람은 죽은 후 그 경지 속에 머물러 있게 되는데 그것이 무색계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삼매력이 다하면 다시 무색계 아래의 세계로 추락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기 전에 알라라깔라마에게서 배웠던 무소유처삼매와 웃다까라마뿟따에게서 배웠던 비상비비상처삼매 모두를 버리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무색계가 정신적 경지의 세계, 단일한 의미의 세계이긴 하지만 이 역시 윤회의 세계일 뿐입니다.
 
글수정,삭제No. 39
이 름 권 순애 2005-03-11
전자우편 tks@netian.net
남 긴 글 기본적인 의문은 인터넷이나 책을 찿아보시는 것이 훨씬 빠르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리고,우리 전5식에 감지 안되는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은 그 아무도 명확한 답을 못내릴 것입니다.단지,상징으로 보는가 아니면 사실로 보는가의 차이를 둬야하는 데,물론 그것은 각 개인의 이해에 맡겨야 되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생로병사의 고해를 건너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득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적이겠지요.높은 데 올라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글수정,삭제No. 38
이 름 강병균 2005-03-11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답 감사합니다.

존재의 세계와 의미의 세계로 나누어 진다면 무색계 4천은 존재의 세계인가요? 아니면 의미의 세계인가요?
 
글수정,삭제No. 37
이 름 김성철 2005-03-10
남 긴 글 이름 대신 아이디가 올려졌네요.
손가락이 제 멋대로 작동했던 것 같습니다.
제 아이디입니다.
 
글수정,삭제No. 36
이 름 강병균 2005-03-10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madhyama 님은 김성철교수님과 동일인입니까?
 
글수정,삭제No. 35
이 름 madhyama 2005-03-09
남 긴 글 유식학에서 말하는 부처의 삼신설에 대비시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이시고,
화엄경의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 부처님이시고,
아미타 부처님은 보신 부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존재의 세계"는 화신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셨던 물리적 세계, 즉 이 사바세계뿐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아미타부처님은 정신의 세계, 영의 세계, 다시 말해 의미의 세계에 사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꿈에 보이는 세계 모두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에 속하지만 우리가 꿈꿀 때 실재하는 것으로 알듯이, 아미타불 극락정토의 모든 모습 역시 "꿈과 같이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 법, 보, 화 삼신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공성은 법신이고, 우리의 육체는 화신이며, 모든 의미를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보신입니다.
 
글수정,삭제No. 34
이 름 강병균 2005-03-08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답장 감사합니다. 저두 개강으로 조금 바쁘긴 합니다.

아미타불의 정토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셰계라하셨는데요 극락세계를 묘사하는 아미타경과 같은 경전에 의하면 그 국토에는 산과 강이 없고 벌레도 없고 길에는 보배나무가 서 있고 바람이 불면 나무들은 법문을 설하고 집들은 서로 가까이 있고 똥을 누면 대지가 저절로 닫혀 똥을 치운다는 묘사가 있읍니다. 이 모든 묘사는 존재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지요?
 
글수정,삭제No. 33
이 름 김성철 2005-03-08
남 긴 글 강병균 교수님
개강으로 바쁘시겠지요.
방학 끝내고 연구실에 들어오니 책상 위에 우편물들과 공문서들이 하나 가득이더군요. 아직도 다 정리하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말씀하신 아미타불이나 아촉불 등의 불국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말씀하시듯이 삼계에 28천이 있다고 하는데 불전에서는 '수미산 하나마다 이런 삼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수미산 동쪽에 해가 뜨면 수미산 서쪽에서는 해가 지고..."라는 경전의 구절로 볼 때, 수미산은 "지구"를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에서 해가 뜨면 한국에서는 해가 지듯이...
지구라는 용어가 없기에 '큰 흙덩어리'인 '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우주론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는 <기세경>이나 <대루탄경> 또는 <구사론> 등에서 "수미산 하나마다 해와 달이 딸려 있다'고 쓰고 있는데, 여기서 해는 '별'과 마찬가지이기에 별 하나마다 수미산 하나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밤하늘에 보이는 별 각각에 삼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전에서는 '수미산이 천 개 모이면 하나의 소천세계가 되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하나의 중천세계가 되고, 중천세계가 천개 모이면 삼천대천세계가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삼천대천세계에는 1000*1000*1000, 즉 10억 개의 수미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계가 10억개 모인 곳이 삼천대천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 삼천대천세계이지만 일불국토(一佛國土)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한 분이 관여하는 세계란 의미입니다. 망원경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 전체가 일불국토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런 일불국토들을 십만억 개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가 있으며 동쪽으로 무한히 가면 아촉불의 유리광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정토나 아촉불세계 등은 삼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삼계를 지난 저 멀리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물론 이런 정토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할 경우에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전통 교학에서는, 극락정토는 이 지구와 같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라고 가르칩니다. 이를 '보토(報土)'라고 부릅니다. 법신 부처님이 사는 법성토(法性土)는 공성의 세계, 화신부처님이 사셨던 물리적 세계는 화토(化土), 그리고 영적인 부처님인 아미타부처님이나 유리광여래가 사는 영적인 세계는 보토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삼신이 사시는 곳이 각각 법성토, 보토, 화토입니다.
더 풀어 말하면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에 있는 나라가 극락정토입니다.

통도사 조실이셨던 월하스님이 열반하신 후 6*7재를 지내는데 총무원장 스님께서 조사를 낭독하시던 중 서쪽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리며 서광이 나타났습니다.
통도사 홈페이지 들어가서, 월하스님 배너를 클릭하면 그 때 촬영한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비식 치른 날 밤에 빛 기둥이 올라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도 있습니다. 직접 본 분 말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쪽 하늘에 무지개 색깔의 서광이 엉기는 것을 보고
모두들 월하스님께서 서방 극락정토에 가셨을 것이라고 얘기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얘기가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전 궤도를 그려 볼 때 해가 지는 서쪽은 계절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쪽 하늘에서 서상(瑞相)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무량수경에서 말하는 서쪽이 물리적 방향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 속의 서방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의미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서상의 예를 볼 때 의미가 존재를 만들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적 기적들이 그 예가 되겠지요.

'서방극락정토'라고 할 때의 서방은, 존재의 세계, 물리적 세계의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에서의 서쪽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전통교학에서 말하는 '보토(報土)' 역시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마치 '부피 없는 꿈속'에 엄청난 공간이 펼쳐져 있듯이 ...

 
글수정,삭제No. 32
이 름 김성철 2005-03-08
남 긴 글 먼저, 신권철 선생님 제안 잘 보았습니다.
제가 경주에 온 후 재작년까지 몇 년간 학생들과 윤독 모임을 가졌었고, 작년에는 교수불자회 금강경 강독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내년 중반까지 책을 두 권 발간해야 합니다. 한 권은 민족사와 약속한 <중관학입문> 또는 <중관사상>이라는 제목의 책이고, 다른 하나는 올 9월부터 1년간의 연구년 동안 쓰기로 학교에 약속한 <승랑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입니다. 두 책의 원고량을 합하면 약 3000매 이상 되는데, 내년 중반까지 모두 완성해야 하기에 물리적으로 봐도 별도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경주에 온 후 불교계 신문이든, 학교 신문이든 원고청탁이 들어오는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많은 글을 써왔는데, 요새는 어떤 원고청탁이 와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을 만드는데도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신 선생님 제안하시는 오프라인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는 것, 불교상담분야의 연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겠지만 제 사정상 지금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 상에서 불교상담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31
이 름 강병균 2005-03-08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초기 불교는 삼계를 설하며 하늘나라는 28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대승불교가 등장하며 무수한 불국토를 설합니다. 동방 아촉불의 정토, 서방 아미타불릐 정토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전에도 이들 정토들이 삼계에 속한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읍니다. 28가지 하늘나라 어디에도 이들 정토들이 끼어들 곳이 없읍니다. 그렇다면 이들 정토들은 3계밖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모든 존재는 3계를 윤회한다는 즉 3계안에 존재한다는 불교 가르침에 모순되지 않읍니까?
 
글수정,삭제No. 30
이 름 신권철 2005-03-04
전자우편 komari@chollian.com
남 긴 글 김성철선생님,

저는 대학원 불교상담전공의 3학기차인 신권철입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study club을 만들면 어떨까요 ?
이 site에 방문 & 질의하는 여러 구도자들과 함께 1달에 1번씩 조용한 장소에서 모여 경전과 논문을 읽고 감상과 토론과 명상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뜻이 있으시면,제가 한번 기획해보겠습니다.

2005.03.03
 
글수정,삭제No. 29
이 름 신권철 2005-03-04
전자우편 komari@chollian.com
남 긴 글 김성철선생님

불교대학원 불교상담전공의 신권철입니다.

2004년 가을학기에 보리도차제론과 티벳어등을 명확하게 잘 배웠습니다.
또한,
친절한 선생님의 개인 성품 또한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5.03.04
 
글수정,삭제No. 28
이 름 김성철 2005-02-22
남 긴 글 아래 이범기님의 질문은, 불교교리문답 게시판으로 옮겨 답을 합니다.
 
글수정,삭제No. 27
이 름 이범기 2005-02-22
전자우편 80deleuze@hanmail.net
남 긴 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성철선생님의 홈패이지를 통해서 여러가르침을 얻고 있는 배움자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인과응보설에 관하여 의문이 생겨서 이렇게 선생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초기불교 시대에 신통제일이라고 불리던 목련존자는 외도의 돌에 맞아서 돌아가셨다고 배웠습니다.

목련존자의 입장에서는 전생에 지었던 자신의 과보에 의해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련존자의 과보의 해결을 위해서 외도의 또다른 악행,악업은 필연적인 것인지요.

만약 그 외도가 목련존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또 목련존자는 전생의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되어 졌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목련존자에게 나쁜짓(악행)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잠재적인 차원에서 누군가의 악행이 현실화 된다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그 행위는 정당화 되는 것인지, 그러한 행위가 숙명론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습니다.

제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잘못알고 있는것인지요. 순수불교교리는 아니지만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범기 합장
 
글수정,삭제No. 26
이 름 김성철 2005-02-05
남 긴 글 서버 이전 관계로 이제야 들어와 글을 올립니다.

제가 융 심리학을 깊이 공부해 보진 못했기에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융은, 히틀러 출현 이전에 많은 환자들이 호소하던 '노란 머리의 독재자 영상', 또 다른 사람,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을 멀리 떨어진 내가 동시에 감지하는 것 등을 예로 들어 Synchronity(동시성)란 개념을 창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구적 의미의 인과율'로는 해명이 불가능한 증례들에 대해 깊이 천착한 결과 얻어진 개념입니다.

그리고 융은 이를 '개인적 무의식' 이전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무의식, 즉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과 연관시킵니다. '집단무의식'이란, 교수님 설명과 같이 '타인과 내가 공유하는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융이 갖가지 신비한 심리현상에 대해, 일반적 서구 학자들과 달리 '합리성'과 '객관성'이라는 표피적 방법론을 넘어서, 깊이 천착하고자 했던 점은 높이 살 수 있어도, 그런 심리현상을 생물학적, 인류학적 기미가 강한 '집단무의식' 개념으로 해석한 것은 반드시 옳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빛이 파동적인 면과 입자적인 면을 모두 갖는다고 하는데 이는 비단 빛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사가 입자적 측면 즉 국소적 측면과, 파동적 측면 즉 편재적 측면을 모두 갖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컵을 볼 때, 그 컵이 책상 위에 있다고 보는 것은 국소적 접근입니다.
그런데 사실 컵의 영상은 망막에 비춰진 것입니다. 컵의 영상이 이 방 안에 있는 누구에게나 보이기에 컵의 영상은 이 방 안에 꽉 차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편재적 접근입니다.
그리고 이런 편재적 접근, 파동론적 접근에 의해 이 세상을 조망하는 내용이 많이 담긴 불경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컵과 같은 시각영상뿐만 아니라 내 목소리도 이 방안에 편재하고, 이 방안의 모든 물건의 영상도 이 방안에 편재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도 지금 떠올린 순간 모든 곳에 편재합니다. 마치 불빛이 편재하듯이... 그래서 텔레파시가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육신통 중에 타심통, 천이통, 천안통 등은 이런 화엄적 '편재성'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TV, 라디오, 핸드폰 모두 이런 화엄적 이치가 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발명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타인의 의식이 나에게 동시에 자각되는 것, 멀리서 일어난 일을 내가 알아채는 것 등을 융은 '집단무의식'과 연관시키지만, 불교적으로는 이런 화엄적 편재성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본 홈피 문서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화엄사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라는 제 논문은 현대의 정보통신문명과 화엄사상을 비교하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논문 속에 이런 편재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끝으로 교수님께서 '타인의 의식과 나의 의식이 어느 정도 중첩되는지?'라고 질문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설명드린 화엄의 이치에 의거한 것으로, '완전히 중첩된다'는 답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모든 사람, 모든 생명체의 모든 의식이 나의 의식과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번뇌가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어서 남의 의식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남의 마음을 알아채고, 멀리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예지력이 생기는 것 등이 신비한 일이 아니라, 화엄의 이치로 인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의 모습이 온 우주에 편재하듯이(ex - 月印千江), 모든 생명체의 의식은 온 우주에 편재합니다.

두번 째는 유식학의 아뢰야식 이론, 업설에 의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업에는 共業과 別業이 있다고 합니다.
공업은 함께 짓는 업이고, 별업은 나만의 특수한 업입니다.
공업을 지을 경우 공업의 種子가 우리의 아뢰야식에 내장되고 별업을 지을 경우 별업의 종자가 우리의 아뢰야식에 내장됩니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각각의 업 종자가 과보의 싹을 티우게 되는데, 공업 종자의 과보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체험되고 별업의 과보는 나만 체험합니다.
외국에 나가 한국민으로서 받는 대접, 6.25전쟁의 상흔 등의 과보는 우리 국민 중 남과 공유하는 아뢰야식 내의 공업 종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인임에도 내가 남과 다르게 받는 고락의 과보는 별업의 종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보뿐만 아니라 짓는 업도 마찬가집니다.
남과 함께 짓는 행위는 공업 종자를 형성하고, 나 홀로 하는 행위는 별업 종자를 형성합니다.
남과 공유하는 아뢰야식이 있다고 할 때, 융이 말하는 '신비한 체험들'뿐만 아니라, 이런 '일상체험' 역시 '공유하는 아뢰야식'의 예에 포함됩니다. 아니, 오히려 일상체험의 영역에서 '남과 공유하는 아뢰야식의 범위'가 더 크겠지요.

융의 심리학에 대한 저의 '상식'에 근거한 답이기에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불교적 견지에서 해석한 '화엄적 중첩'과 '아뢰야식의 중첩'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얘기드린다면, '공유'나 '중첩'이라는 개념의 사용으로 인해 아뢰야식에도 부피, 넓이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물질의 세계에는 연장(延長: extension), 즉 공간적 크기나 넓이가 있지만, 아뢰야식에는 크기나 넓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 의식은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교신앙과 수행의 목표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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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글수정,삭제No. 25
이 름 강병균 2005-02-03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매번 친절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양심리학에 의하면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융은 임상경험에 의하여 환자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상징이 환자의 꿈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개체가 경험하지 않은 것도 타인의 경험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민족이나 국가가 과거에 경험한 것이 지금의 민족 구성원이나 국민들의 무의식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 집단무의식에 해당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융의 이론을 따르자면 개개인의 무의식은 타인의 무의식과 중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식 무의식을 통틀어 식이라고 하면 융의 이론은 개개인의 식은 타인의 식과 어느정도 중첩이 된다 이런 말로 이해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은 독립된 개개인의 식이 아닙니까? 이 아뢰야식이 타인의 아뢰야식과 어느정도 중첩이 가능한지요?
 
글수정,삭제No. 24
이 름 김성철 2005-01-27
남 긴 글 강 교수님께서 올려주시는 질문들과 착상들은 불교사상의 첨예한 문제들과 관계되이기에 이 홈피에 들어오는 다른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강의할 때는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고까지 설명합니다.
본 홈페이지 중 불교TV 강의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제27번 항목에 교수님의 설명과 같은 내용의 강의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울산대 철학과 김진 교수 역시 무아와 윤회에 대해 잘못 이해하신 채 수편의 논문을 발표하다가 이대 철학과 한자경 교수 등 많은 불교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현대불교학에서 일본불교학자들의 역할과 비중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넌센스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아'가 옳은지 '비아'가 옳은지를 놓고 벌인 논쟁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도언어는 영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에 부정표현이 단순합니다. 즉, 無와 非와 不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He is not a boy의 is not은 비(아니다),
He is not happy의 is not은 불(않다)
There is not a boy의 is not은 무(없다)를 의미하지만 영어에서는 이 세 가지 의미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무아와 비아도 이와 같아서 산스끄리뜨 원어에서는 구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동아시아 언어로 번역할 때는 문장의 맥락에 따라, 무아라고 해도 되고, 비아라고 해도 됩니다. 불생불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생무멸이라고 번역해도 되고, 비생비멸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이에 대한 제 논문 '중론 귀경게 팔불의 번역과 배열'이 본 홈피 문서자료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놓고, 무아가 맞는지 비아가 맞는지, 불생불멸이 맞는지 무생무멸이 맞는지 논란을 벌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넌센스이지요.
서구불교학자들은 더합니다. 서구인들에 의해 시작된 현대불교학이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잘못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이를 시정하여 불교의 정도를 닦는 것은, 제도권 내에서든 밖에서든 한국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신행하는 사람들의 사명일 것 같습니다.
 
글수정,삭제No. 23
이 름 강병균 2005-01-27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정승석교수님의 저서 "윤회의 자아와 무아"라는 책을 보면 무아설과 윤회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려고 보특가라설 알라야식설 등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비단 위 책만이 아니라 여러 불교 서적에서 윤회와 무아설이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하는데 저는 이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변하는 것이 윤회한다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 모순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만이 윤회할 수 있다고 스스로 가정하는 것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즉 윤회와 무아가 모순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이 윤회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반드시 변하지 않아야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 아닌지요? 갓난 아이적의 나와 50년후의 나사이에도 윤회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아트만을 가정하지 않고도 갓난아이는 노인이 됩니다.아트만을 가정하지 않고도 씨앗은 나무가 됩니다.죽음후의 윤회나 갓난아기가 노인이 되는 현생의 윤회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왜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된다고 주장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왜 일본학자들은 이 문제를 왜 그리도 요란하게 제기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글수정,삭제No. 22
이 름 강병균 2005-01-21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탐진치를 물리치는 수행중에 진에 대응하는 수행법이 자비관이라하는데 왜 자비관인지 오랫동안 이해가 잘 가지 않았읍니다.그런데 진에 미움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면 그 의미가 너무나 명확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21
이 름 김성철 2005-01-21
남 긴 글 삼독심 가운데 진(瞋)에 해당하는 범어 원어는 dvesha(드베샤와 드웨샤의 중간 발음)입니다(여기서 sh는 s자 아래에 점(.) 을 찍어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 뜻은 hatred, dislike, enmity to 등입니다. 범어는 약 2000개의 어근(root)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말인데, dvesha의 어근은 dvish(드비슈, 또는 드위슈)로 그 뜻은 to hate, show hatred against 등 입니다. 따라서 dvesha는 증오, 미움, 분노, 성냄, 적개심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어떤 단어든 한 언어권에서 쓰이는 단어의 외연(범위)과 내포(의미)는 다른 언어권의 단어의 그것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번역할 때에는 문장의 맥락을 보고 번역해야 합니다.
또 불교용어는 모두 수행체험에서 도출된 것이기에 어떤 하나의 번역어를 통해 그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의 심성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삼독심을 이해합니다.
탐심은 '나'를 향해 잡아당기는 마음이고, 진심은 '나'로부터 밀쳐내는 마음입니다. 탐심과 진심은 벡터의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이런 탐심과 진심은 이쪽 어딘가에 '자아(나)'가 있다는 치심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구심점이 되어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마음이 탐심과 진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삼독심을 제거하는 수행으로 부정관과 자비관과 연기관을 제시하십니다. 부정관이란 내 몸이나 이성의 몸이 더럽다는 생각을 자꾸 떠올리는 수행으로 '밀어내는 마음'을 강화시키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끄는 마음'인 탐욕을 중화시킵니다. 벡터가 상쇄되는 것이지요. 자비관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바라고 슬픔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나를 향해 끌어 당기는 마음'을 강화시키는 수행입니다. 이런 자비관을 통해 '미는 마음'인 증오심, 진심이 중화됩니다. 마음의 벡터가 상쇄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무아를 자각하지 못한 이상, 경계가 닥칠 때 다시 탐심과 진심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무아, 즉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자각함으로써 치심이 제거되어야 탐심과 진심이 영원히 사라진 아라한이 된다고 합니다. 구심점이었던 아상이 사라져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마음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유한다면, 누군가 미쳐서 날뛸 때 힘 센 사람이 그를 잡아 누르면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를 놓아 주면 다시 미쳐서 날뜁니다. 그런데 잡아 누른 후 그의 목을 따서 죽이면 그는 널부러져 다시는 날뛰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서 힘센 사람이 그를 잡아 누르는 것이 계와 정의 수행에 대비되고, 그의 목을 따서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공과 법공의 지혜를 자각하는 것에 대비됩니다. 좀 살벌한 비유이긴 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아라한을 살적(번뇌의 적을 죽인 분)이라고 번역하는 것, 또 티베트 불교의 야마까라는 분노존(화내는 부처님)께서 사람을 찍어 누르고 방망이로 그의 두개골을 부수는 모습이 바로 이런 수행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분노존 아래 깔린 사람은 아집과 법집을 상징합니다.

짧게 질문하셨는데 답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분노존의 그림을 동국대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려놓겠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20
이 름 강병균 2005-01-21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질문이 있읍니다.

탐진치 삼독심중에서 진이라는 것이 "성냄"으로 알려져있는데 선생님 책들에서는 때때로 "미워함"으로 번역된 것을 기억합니다. 진에 해당하는 인도말은 원래 무슨 뜻인가요?
 
글수정,삭제No. 19
이 름 김성철 2005-01-19
전자우편 madhyama@chollian.net
남 긴 글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수 스님께서는 선수행을 말씀하시고
혜능 스님께서는 선수행에 대한 반야적 조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지적하시듯이 반야적 조망이 바로 승의제입니다.

첨언하자면, 우리가 '선종'이나 '선문답', '선어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도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반야종'이나 '반야문답'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선어록에는 '선수행'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해체의 지혜인 '반야지혜'에 대한 가르침만 가득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소위 '선종'에서는 인도불교적 의미의 '선수행' 방법을 많이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 속의 때를 털어 내라는 신수 스님의 가르침 역시 혜능 스님의 조망에 못지 않는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양자의 우열을 가리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글수정,삭제No. 18
이 름 강병균 2005-01-19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 교수님 질문이 있읍니다.

용수보살의 말씀에 의하면 승의제와 세속제가 있읍니다.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을 세속제와 승의제의 관점에서 볼 수 는 없는지요. 용수보살에 의하면 사제도 자성이 없기에 본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열반도 없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용수보살은 세속제의 관점에서 도를 닦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신수의 시시근불식은 바로 세속제의 입장에서의 수행이고 혜능의 본래무일물은 승의제의 관점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요? 교수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글수정,삭제No. 17
이 름 김성철 2005-01-17
전자우편 madhyama@chollian.net
남 긴 글 자세히 읽어 주시고 좋은 지적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구마라습의 한역문에는 교수님의 지적과 같이 '생 없이도 노사가 있는 꼴이 되리라(불생유노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해당하는 범어 원문에는 '죽지도 않은 것이 생하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책에 실린 번역문은 범어 게송에 대한 것입니다.
범어 원문에 그대로 일치하는 한역문은 없습니다. 구마라습 법사가 오언시 형식에 맞추기 위해 '불생유노사'라는 구절을 더 만들어 넣은 것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구마라습의 한역문은 게송의 일관된 이해에 혼란을 초래할 것 같아 범어 원문에 대한 번역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중론, 논리로부터...>를 만들면서 게송의 번역문 아래에 한역문을 대조해 놓기로 마음 먹었기에 번역문과 다른 한역문을 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p.115에서 보듯이 범어 원문을 대조한 경우도 있기에 혹 재판을 찍게 되면 한역문 대신 범어 원문을 대조해 놓도록 수정하겠습니다.
좋은 지적 해 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16
이 름 강병균 2005-01-17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 질문이 있읍니다.
선생님저 "중론,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을" 을 읽고 질문을 드립니다. 상기 저서는 명저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읍니다.
139쪽에 용수의 게송 MK.11-3 에서 마지막 구인 "불생유노사" 부분을 교수님 께서 "죽지도 않는 것이 생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실수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생없이 노사가 있으리라" 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나 합니다. 선생님 역서인 중론 205쪽에 이렇게 나와있기도 합니다. 생이 먼저고 노사가 나중이라면 생이 발생할 때 노사는 아직 없어 노사없는 생이고 노사가 발생시 이미 생이 없으니 생없는 노사가 있다는 뜻이 아닌지 질문을 드립니다.
 
글수정,삭제No. 15
이 름 김성철 2005-01-15
전자우편 madhyama@chollian.net
남 긴 글 조언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저 역시 <판비량론> 책 처음 받아 보고 너무 크게 실린 사진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탐, 진, 치, 만'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교학자이지 수행자가 아닙니다.
아직 지도만 그리고 있을 뿐, 지도 들고 여행을 떠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언어로 쓰여진 구도자들의 여행담을 토대로 정확한 지도를 그려서 수행의 여행을 떠나는 분들에게 제공해 드리는 것이, 아직 젊은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저로 하여금 수행의 길을 가게 만드는 인연들이 자꾸 만들어집니다. 교수님의 조언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머지 않아 수행도 열심히 하는 재가불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수정,삭제No. 14
이 름 강병균 2005-01-12
전자우편 bgkang@postech.ac.kr
남 긴 글 김성철교수님께

저는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입니다.
김교수님의 책을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선생님 홈페이지에 실린 글들도 많이 읽어 보았읍니다.
무르티의 중론 번역서와 선생님이 쓰신 중론 입문서 그리고
청목스님의 중론소 번역등 주옥같은 저술들을 읽었읍니다.
선생님의 논리정연한 저술스타일에 매료되어 다른 책들을
안터넽서점에서 주문하여 오늘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
를 받아보고는 저는 까무쳐질 정도로 놀랐읍니다.
표지 뒷면에 선생임 사진이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대문짝
만하게 실려있는 것이었읍니다. 중론에 실린 선생님의
불교에 대한 생각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였기 때문입
니다. 남들이 보면 선생님이 스스로 원효성사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선생님이 동의하시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입니다.
그런데 사진은 웅변적으로 "유아"를 외치고 있읍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저술을 사랑하기에 띄우는 글이오니 제가
오해를 하였다면 너그러이 용서를 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13
이 름 이범기 2005-01-08
전자우편 80deleuze@hanmail.net
남 긴 글 안녕하십니까? 김성철 선생님!
2002년도 여름에 BTN불교아카데미를 통해서
많은 가르침과 환희를 얻었던 배움자입니다.
2002년 말에 군대를 갔다가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음주면 전역을 하게 됩니다.
사회로 돌아오면 다시 먼 발치에서나마 김성철선생님을
스승삼아서 불교공부를 열심히 하고싶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하오며..
이범기 합장


 
글수정,삭제No. 12
이 름 김성철 2005-01-08
전자우편 madhyama@chollian.net
남 긴 글 송광사에서 올라와 이제야 임동숙 (진짜)보살님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이 홈페이지에 들어오신 분들도 올 한 해 더욱 건강하시고, 나날의 삶 보람으로 가득하기를 三寶전에 두 손 모아 기원하옵니다.
 
글수정,삭제No. 11
이 름 임동숙 2005-01-03
홈페이지 http://www.womenhomeless.or.kr
전자우편 seandsky@naver.com
남 긴 글 안녕하세요~~~
ㅋㅋ
일단 좀 웃고... 제가 원래 웃음이 좀 헤퍼서요.
교수님께서는 제가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딱 한번 뵈온 교수님을 잊어 버리지 않고
급기야 이렇게 홈피에 족적까지 남기게되었사옵니다.
(아니 근데 요즘엔 홈피관리를 잘 안하시는가봅니다. 해도 바뀌었는데 어찌하여 인삿글 하나 올리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교수님 성격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린 걸까요? ㅋㅋ)

저는 지지난해 INEB 때 이동하는 차량속에서 김성철교수님과 인사를 나누었던 (사)우리는선우 소속 임동숙이라고 합니다. 맡고 있는 일은 여성노숙자쉼터 화엄동산에서 사무장을 하고 있구요(참고로 부하직원은 한명도 없는 독고다이 사무장입니다), 교수님 홈피에는 종종 들러봤지만, 별다른 명분이 없어 글을 남기지 못하다가, 일케 해바뀜을 핑계삼아 괜히 인연을 만들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구요, 또 행복하세요.
저는 교수님같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에는 아직 밑바닥에서 질척거려야할 세월이 많이 남은 것 같아서, 올해엔 성질 덜 피우고 쌍욕안하고 살 것을 서원할 뿐입니다.

교수님! 불교 너무 어렵게 가르치시면 안돼요. 저같은 무지랭이 중생은 그런 어려운 교수님은 미워요. 한번도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저의 편견!!

생뚱맞은 새해인사를 남기니 제가 무지 주책바가지로 느껴지는군요. 음 ....그럼 이만 공손히 두손모으고 하직인사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글수정,삭제No. 10
이 름 윤정섭 2004-10-26
전자우편 yjeongs@unitel.co.kr
남 긴 글 선생님의 조언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일반인을 위한 불경 해설서들이 많이 나왔으며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십시요.
 
글수정,삭제No. 9
이 름 시우 2004-10-14
전자우편 gwnmmr@hanmail.net
남 긴 글 안녕하세요? 저는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되어 틈틈이 들어와 공부하고 블교의 향기를 맡는 한 수행자입니다. 저는 다방면의 수행방법에 관심이 많아 섭렵중입니다. 교수님의 강의와 글들이 저의 영혼에 좋은 양식이 됩니다.
 
글수정,삭제No. 8
이 름 설오스님 2004-07-28
전자우편 solooin@yahoo.co.kr
남 긴 글 교수님께

좋은 자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고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강의듣고 우리 모두 플레시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방학동안에 컴퓨터학원에 가서 플래시 강의를 듣자는 의견도 있는데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있을런지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일만 있으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글수정,삭제No. 7
이 름 설오스님 2004-07-24
남 긴 글 김 성철 교수님께

오늘 아주 유익한 강의와 포교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를 알려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게 있습니다. 혹시 까말라실라가 지은 중간단계의 수행차제(티베트어로는 곰림발바)의 파리어 원전이나 영문판 가지고 계시거나 구할 수 있으신지요?

사실은 제가 한글로 번역을 했는데 미진한 부분이 몇 군데 있어서 참고할까 해서 입니다. 보완해서 책으로 곧 내고 싶어서 입니다.

티베트 서적들을 책으로 내는 일이 많이 미숙하지만 시작을 해놓으면 도움이 될까해서 해보는 것입니다. 다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내용들이어서요.

항상 행복하시고 좋은 연구실적이 많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6
이 름 선해스님 2004-07-24
남 긴 글 교수님께

오늘 봉녕사에서의 강의는 너무나 환상적이었습니다. 아주 이상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숙제 못한 것도 용서하셨겠죠! 왜냐하면 자비송이 주제가이시니까요.

매일 매일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글수정,삭제No. 5
이 름 설오스님 2004-07-23
전자우편 solooin@yahoo.co.kr
남 긴 글 교수님께

너무나 유익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4
이 름 성오스님 2004-07-23
홈페이지 http://반갑습니다.
전자우편 solooin@yahoo.co.kr
남 긴 글 교수님께

교수님 강의를 듣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되고 싶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고요.

계속 많은 연구실적이 있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글수정,삭제No. 3
이 름 손의강 2004-07-02
전자우편 master55@dreamwiz.com
남 긴 글 안녕하십니까?
아직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만,
평상 시 교수님 동영상 강의 열심히 청취하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 자료를 통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사이트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글수정,삭제No. 2
이 름 곰팅 2004-04-08
전자우편 heechan1@freechal.com
남 긴 글 아무도 글을 올려 좋지 않았네요.
제가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제가 있는 지리산은 지금 참 보기가 좋습니다.
맑은 하늘에 며칠전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물소리.
흩날리는 벗꽃잎들...
이곳을 들르는 모든 법우님들에게
지리산의 봄을 전하고 싶습니다.
항상 행복하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