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 |
| 이
름 |
k |
2005-08-11 |
| 남 긴
글 |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국대
학생은 아니지만 불교의 의문점이있어 마땅히 자문을 구할곳이 없어 이곳에 글을 올립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저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나서 누구나 그렇듯이 자연히 절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릴때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같은 것을 생각하기 좋아했기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 심리학 등등 여러 책을 접하였습니다. 물리학을 할려고 하였으나 현대과학의 한계에 실망하였고, 곰곰히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히브리성경 신약 모두 보아도 사랑하라 봉사하라 맘에 와닫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접한것이 사성제와 팔정도 였습니다. 가장
기초되는 것이긴 하지만 석가가 죽을때까지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여 더욱 끌렸습니다. 거기서 나의 길을 찾았습니다. 사성제의 12법륜을 보며
문득 부처님은 의사와 같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고통은 인지 하고 나아질수있음을 인지하고 그방법을 찾아서 고통을 없앤다... 그 과정을 서포터
할 수 있는 것이 의사란 직업이었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린다고 말씀하시는 의사분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무엇이건데
생사여탈권까지 가지고 있겠습니까? 티벳 사자의 서에서 보았듯이 의사는 오히려 환자의 죽음의 과정을 편안하게 해주는게 의사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의과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여러책을 읽다가 '불교가 좋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종교학자 나카지와 신이치와 일본 임상심리학의 거장 가와이 하야호의 문답집 입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중 하나가 바로 불교 경전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불교경전은 팔리어 경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이 적절한 단어가 없어 happiness라는 단어을 선택한것이라는 건데요. 여기선 행복보다는 '안락' '안심(安心'이 라고
하더군요 영어로는 relax가 더 가깝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가지더 제가요즘 혼란을 격고
있습니다. 대승 소승 근본 불교에 관한것입니다. 왠지 대승과 소승은 나쁘다고 할수없지만 뭔가가 와전된느낌이 듭니다. 부처는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 불교는 윤회를 당연시 거론하지요. 정말 혼란 스럽습니다. 맘 같아서는 팔리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제가 직접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정신없지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럼 교수님의 견해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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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44 |
| 이
름 |
김성철 |
2005-08-10 |
| 남 긴
글 |
질문하신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1. 어떤 업이 과보를 초래하는지? 2. 부처님도 업을 짓는지? 3.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지?
각각에 대해 답해 보겠습니다.
1. 나에게 인식된 업은 과보를 초래하지만 나에게
인식되지 않은 업은 과보를 초래하지 않습니다. 불전에서는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 악업을 지은 경우보다, 잘못된 일인 줄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가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일반 상식과는 좀 다릅니다. 잘못된 일인 줄 모르는 사람의 경우 구제불능이기에 그 과보가 더
크고, 잘못된 일인 줄 아는 사람의 경우 개과천선할 수 있기에 그 과보가 적습니다.
'알고 지은 악업보다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가 더 크다'고 할 때 말하는 '앎'은 가치론적 앎을 의미하고, '알고 지은 악업의 과보는 받지만 모르고 지은 악업의 과보는 받지
않는다'고 할 때 말하는 '앎'은 인식론적 앎을 의미합니다.
2. 아라한이나 부처님의 경우 전생 업에 대한 과보는 받지만 그것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른 후 현생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45년 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선언이
가능한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말씀도 하시고 행동도 하시지만(구업과 신업), 부처님 당신이 자신을 볼 때는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행동을 해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선악의 기준은, 5계나 10선계와 같은 계목입니다. 계를
어긴 것은 악업이고, 계를 지킨 것은 선업입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악구, 양설, 기어, 탐욕, 진에, 사견을 짓지 말라는 것이
십선계인데, 이를 저지른 것은 악업이고, 이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선업입니다. 그래서 십선계를 십백업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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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43 |
| 이
름 |
원명 |
2005-08-10 |
| 남 긴
글 |
더운 여름 한철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업에 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십습니다.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업은 의도적이고, 선악을 분
별하는, 윤리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도적이라는 것은
어느범주까지 포함하는 것
입니까? 가령 저는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업력에
끄달려 tv를 켜고, 간식에 손이 가고,
메일을 확인합
니다.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한 혹은 악한 행위
를 하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인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떠한 행위라도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다만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과보를
초래할 지 알고 악업을 줄이고 선업만을 짓는다고 생각
합니다. 업에 의해 형성된
몸이 있는 한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악, 윤리의 기준은 어떻게 정할 수 있는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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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42 |
| 이
름 |
신오유 |
2005-08-08 |
| 남 긴
글 |
김성철 교수님의
유식무경/유경무식/경식구망의 의미를 잘 읽고 이해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 풍경과 인식이 함께 무너지는 공성과 연기를 매일 명상하여 분별과
의심과 후회와 성냄과 죽음과 삶에서 벗어나는 결국에는 해탈하는 즐거움을 향하겠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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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41 |
| 이
름 |
김성철 |
2005-08-06 |
| 남 긴
글 |
유식의 교리는
복잡다단합니다. 학파가 다양하고 교리가 다양합니다.
앞의 질문이 짧아서, 질문의 취지를 헛짚어, 질문한 분의 기대와 다른 답을
올린 것 같습니다. 경식구민의 교리를 모르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
그런데 경식구민(境識俱泯)의
이치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유경유식 -> 유식무경(또는 무경유식) -> 경식구민'으로 이어지는 조망의 향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사물이 보일 때, 안식이 생기는데 이 때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삼자에
선(線)이 그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에 대해
물질이라느니, 마음이라느니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 한 덩어리의 시각현상에 대해 마음이라고 불러도 되고 다 물질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기(氣)라고 불러도 되고, 풍경이라고 불러도 되고, 내 망막의 살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식(識) 일원론이든,
유물론이든, 기(氣) 일원론이든 모두 마찬가지로 일원론일 뿐입니다.
경식구민, 또는 경식구망의 가르침이 시사하듯이, 더 높은
조망에서는 일원론이랄 것도 없습니다.
-----------
지금 올린 질문들 모두에 대해 본 게시판을 통해 속 시원하게
모두 답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유식학을 혼자 연구하시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식학에서 말하는
'형상(아까라)'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유식학파는 유형상유식파와 무형상유식파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식학 개론서를 보면, 유형상이나 무형상에 대한 설명이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有)형상유식을
동(同)형상유식이라고 번역하고, 무(無)형상유식을 이(離)형상유식이라고 번역하면, 이 두 가지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형상유식이란, 외계 사물의 형상이 그대로(同) 우리의 식과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무형상유식이란, 외계 사물의
형상과 별개로(離) 우리의 식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제가 소개한 구유식에서 무형상유식을 주장하고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에서 유형상유식을 주장합니다.
<종은> 님께서 올린 글을 보면 '유가행파는 현실경험세계에서 인식의 대상은 그 대상의
형상을 띤 식 바로 그것이며 그 형상은 외계사물이 투사한것이 아니라 식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만든 표상이며,외적인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써 있는데..'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유식의 가르침 가운데 유형상유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유식의 가르침이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 유식의 가르침은 언어와 분별과
개념을 축조해 가면 구성한 것이기에, 어떤 입장에서 설명해도 교리의 내적모순에 대한 의혹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개념과 생각이
무너지는 공성을 파악할 때만 모든 의심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연기 공의 가르침을 희론적멸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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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오형근 박사님, 경주 동국대 이만 교수님, 서울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이신 묘주스님, 서울 동국대 인도철학과 강사인 김성철씨(저와 동명이인입니다) 등이 유식학을 전공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께 문의하면 보다 전문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No. 140 |
| 이
름 |
종은 |
2005-08-06 |
| 남 긴
글 |
유식무경이 결국에는
경식구민의 중도진리를 말하기 위한 것인줄은 알지만 유식무경이라는 말자체가 그대로 진제차원의 조망은 아니기에 어려움이 있읍니다. 유식무경은
현실경험세계를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보려는 속제차원의 조망이고.....현실경험세계속에서 유식무경을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오위법중 색법을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움이고, 유경무식이라 하더라도 현실경험세계를 파악할때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는데...마찬가지로 오위법중
심왕법과 심소법,무위법을 어떻게 유물론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되는지 모르겠읍니다. 유가행파는 현실경험세계에서 인식의 대상은 그 대상의 형상을
띤 식 바로 그것이며 그 형상은 외계사물이 투사한것이 아니라 식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만든 표상이며,외적인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써 있는데....식의 상분을 견분이 인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식의 분화를 일으키게하는 매개가 될만한 어떤 사물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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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39 |
| 이
름 |
김성철 |
2005-08-05 |
| 남 긴
글 |
<종은> 님의
질문에 대해 답해보겠습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 문자 그대로 풀면 '오직 식만 존재할 뿐 대상세계는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취지는, '<객관인 대상>과 <주관인 의식>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분별을 타파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식'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식(識)일뿐'이라면 '식'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식 아닌 것'이 존재해야 '식'이 존재할 수 있는데, '식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에 대해 '식'이라고 이름붙일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식무경'보다 상위의 조망으로
'경식구망(境識俱妄)'을 말합니다. 객관대상이 있다거나 주관적인 의식이이 있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란
뜻입니다.
유식무경이라는 말의 취지가 모든 것을 마음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대상의 이분법을 깨주기 위한
것이기에, 유식무경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유경무식'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오직 객관대상만 존재하고 주관적 의식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객관대상을 우리 앞에 나타나는 '풍경'이라고 명명한 후 엄밀히 조망하면, 모든 것은 '풍경'뿐이며, 마음은
없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풍경(風景), 나뭇잎이 흔들리는 풍경, 눈 앞의 컴퓨터 모습도 모두 풍경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내
의식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도 이런 풍경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불쑥 어제 먹었던 포도가 생각납니다. 창 밖에서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듯이, 내 의식에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모두가 풍경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직 풍경만
존재할 뿐 나는 없다'(有境無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식무경이라는 말이나 유경무식이라는 말이나 그 취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보면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폭류처럼 콸콸 흘러가는 현상의
흐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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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38 |
| 이
름 |
종은 |
2005-08-05 |
| 남 긴
글 |
유식무경이라는 말을 참
이해하기가 어렵읍니다... 일체가 표상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이해가 가는데..어떤 매개적인 표상이 되어 우리에게 그 실재가 알려지는
것같은 외적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경은 이해가 안됩니다.... 가유로서 외부사물의 존재조차도 부정한는 것인지...그렇다면 근과경을
연하여 식이 생긴다는 가르침과 서로 모순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교수님의 명괘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
No. 137 |
| 이
름 |
강병균 |
2005-07-18 |
| 남 긴
글 |
아래 김성철교수님의
계정혜에 대한 글은 참 좋은 글입니다. |
No. 136 |
| 이
름 |
만불사 |
2005-07-18 |
| 홈페이지 |
http://영천 만불사에서 열리는 음악회
놀로오세요 ^ ^ |
| 남 긴
글 |
안데스 잉카음악과 국악이
산사에서 만나다. 영천 만불사에서는 7월 20일 오후 7시 제3회 매월 달맞이 산사음악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산사음악회에는 안데스
산맥의 잉카음악과 우리나라 국악이 만나 아리랑과 엘콘돌 파사 협연하니, 산사에서 만나는 전통음악의 향연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산사음악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 및 초대권은 www.manbulsa.org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No. 135 |
| 이
름 |
김성철 |
2005-07-17 |
| 남 긴
글 |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수행이든 그것이 불교라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수행체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계 중 색계의 경지에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 정, 혜> 수행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계> 수행을 철저히 할 경우 수행자는 욕계천의 정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선정> 수행
없이 <지계>만 닦을 경우 결코 색계천에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물론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을 철저히 닦은 수행자의 경우도 색계천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을 <사범주(四梵住)>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범천의 세계(색계 초선천) 이상에 태어나 살게 만드는 네 가지 수행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무량심 역시 초선, 2선, 3선, 4선의
색계선과 관계됩니다. 가부좌 틀고 앉아서 자관, 비관, 희관, 사관을 하는 것인데 희심에서 사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색계 제3선을 완성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청정도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계> 수행이 철저한 수행자, 다시 말해 ‘욕계를
벗어날 자격을 얻은 수행자’만이 참된 <선정> 수행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욕계 위에 있는 것이 색계이고 색계에서 깨달음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지계 수행이 없는 경우는 결코 색계선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그 겉모습만 가부좌 튼 수행자이고, 혹 그가 묘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다만 욕계의 <산정(散定: 산만한 삼매)>에서 얻어진 느낌일 뿐입니다.
색계선을 체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의 깨달음인 것은 아닙니다. 초선, 2선, 3선, 4선 등 색계선을 체득한 수행자는 죽은 후 색계천의 천신으로 살 뿐입니다.
아직 <지혜>는 열리지 않고 색계의 <선정>만 완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색계선의 토대 위에서 다시
수행하여 <지혜>를 닦아야 아라한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緣起)의 지혜’입니다.
이런 연기-공의 지혜가 열려야 수행자는 윤회의 세계, 즉 삼계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해탈, 열반을 하는 것입니다.
삼계의 탈출구는 바로 ‘색계’에 있습니다.
비유한다면, 항아리에 담긴 물에 달 그림자가 비칠 때, 물결이 출렁이면 달
그림자가 이지러집니다. 물이 잔잔해져야 달 그림자가 그대로 비칩니다. 이 때 물결이 잔잔해지는 것이 <선정>에 해당하고
달 그림자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것이 <지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물을 담고 있는 항아리는 <지계>에
해당합니다. 물이 잔잔해져야 달 그림자가 제대로 비치지만, 항아리가 깨지면 아예 물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항아리는 지계에
해당합니다.
<계, 정, 혜> 삼학은 복잡하거나 난해한 수행체계가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의 답을 알고자 알 때 ‘곰곰이 생각’합니다. 여기서 ‘곰곰이’는 정에 해당하고
‘생각’ 혜에 해당합니다.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라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만 너무 심해지면 혜가
열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정이 너무 깊어지면 혜가 열리지 못합니다. 이런 정이 바로 삼계 중 무색계에 이르게 하는 정입니다.
비유한다면 항아리 속의 물이 잔잔해지다 못해 얼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어버리면 달 그림자가 아예 비치지 않습니다.
삼계의 탈출구가 바로 색계에 있기에 <계, 정, 혜> 삼학을 단계적으로 거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계>가 완성되어야 욕계의 정상으로 올라가 색계에 진입할 자격을 얻으며, <정>을 닦아야 색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닦아 온 <계>와 <정>의 토대 위에서 <혜>를 닦아야 비로소 색계에서 탈출하는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계>나 <정>을 별로 닦지 않고도 깨닫는 분이 있습니다. 전생에 많은 수행을
했기에 태어날 때부터 <계>와 <정>을 갖춘 사람의 경우 <혜>만 닦아도 금새 깨달음이 열릴 수 있습니다.
공자님 말씀하신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 다시 말해 ‘태어날 때부터 그 심성이 너무 착하고 집중력이 강한 사람’의 경우는
<혜>만 닦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전 인류 가운데 몇 명 안 될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간화선의
경우 <정>과 <혜>가 열리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 수행이 그 체계 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수행자가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을 중흥시키는 길은
<지계> 수행에 있을 것입니다.
지계 수행은 <자자>와 <포살> 의식과 <갈마>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계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규범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족계를
받아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이를 어길 때 참회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심성과 행동에 진정한 변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정기적으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어긴 계목(戒目)을 고백하고, 율장의 지침에 의거하여 그 죄업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 것, 이런 훈련을 수년 간
해야 비로소 지계가 완성됩니다.
율장의 규범 그대로를 따르지 못한다고 하면, 그 취지라도 되살려서 자자, 포살, 그리고 갈마를
복원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 불교수행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
No. 134 |
| 이
름 |
원명 |
2005-07-17 |
| 남 긴
글 |
안녕하세요??
아래 답변에 복행은 선업, 비복행은 악업, 부동행은
참선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방법이 제시될수 있겠
지만 욕계 6천까지, 거기서 색계 4선까지, 그리고
색계
4선에서 연기를 직관할 수 있을 때까지 단계별로
구체적인 수행법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계종에서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
에게도 간화선을 고잡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거든요.
간화선 수행은 기본 예비 수행이 갖춰져야 들어갈 수
있는 고급수행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째든
수행의
체계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정돼 자신의 수준과
역량에 맞는 단계를 선택해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보리도 차제론을 대안
으로 제시하셨는데 한국불교수행자에게 맞는
수행
체계는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요? |
No. 133 |
| 이
름 |
김성철 |
2005-07-14 |
| 남 긴
글 |
오랜만입니다. 강교수님 방학 잘 보내고 계시겠지요.
'색계에서 가능하다'고 너무 간단히 써서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경지인 초선(初禪), 제2선, 제3선, 제4선의 상태에서 불교의 깨달음이 열린다고
합니다.
색계천이나 무색계천의 경우 그곳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색계선이나 무색계정을 체득해야 한다고 합니다.
욕계의 천상이나 지옥은 그 업에 따라 수직 이동이 가능한데, 색계나 무색계는 수평이동하여 태어납니다.
12연기설의
'행'지분을 '福行, 非福行, 不動行'의 셋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동행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는 업입니다. 그 경지가
되어야 그 곳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래위로 이동함 없이(부동) 수평이동하기에 부동행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욕계의 천상이나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업인 '복행이나 비복행'은 동행(動行)입니다. 아래 위로 수직 이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색계에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말은 욕계인 이곳 인간계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색계선(禪)'의 경지에 올라야
그에 입각하여 연기의 지혜를 체득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간단히 표현하여 오해를 사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
No. 132 |
| 이
름 |
강병균 |
2005-07-14 |
| 남 긴
글 |
김성철교수님
무더운 여름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밑에 교수님이 쓰신 글중에 아라한이 되는 것은
색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스셨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 부처님의 제자 1250 제대아라한은 그럼 아라한이 아니란 말인지요? 지구는
분명 욕계가 아닙니까?
강병균드림.
|
No. 131 |
| 이
름 |
김성철 |
2005-07-11 |
| 남 긴
글 |
아라한이 되는 것은
색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색계는 선정과 지혜가 균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위로 올라가면 선정의 힘이 너무 강해져서 연기를
직관할 수 없고 더 밑의 세계는 분별의 힘이 너무 강해서 연기를 직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색계에 태어나도 연기의 지혜가 열리지
않으면 천신으로 살다가 다시 욕계 이하의 세계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구사론을 보면 아나함의 성인을 몇 가지로 다시
세분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색계에 태어나는 도중에 아라한이 되는 아나함도 있는데 이는 '생반'이라고
부릅니다. 색계에 탄'생'하면서 '반'열반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유행반이라는 아나함의 경우는 색계 이상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아라한이
되는 성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구사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무색계만을 추구하는 요가 수행자는 내생에 무색계천에
갇혀서 500억겁 이상을 내려오지 못하지만, 불교의 연기 지혜가 열린 성자는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대열반에 들기 직전에 무색계천의 경지도 모두 체험하신 후 색계 제4선의 경지에서 대열반에 드십니다.
색계 이상에서 아라한이 되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모두 그 시발점은 인간계입니다. 그래서 인간계에서만 성불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삼매만 닦아서
색계에 태어난 일반 천신의 경우는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욕계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수다원 이상의 불교 성인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인간계에서 유신견(아상)을 모두 끊었기 때문입니다. |
No. 130 |
| 이
름 |
원명 |
2005-07-11 |
| 남 긴
글 |
질문을 드립니다.
색계 이상에서도 수행해서 성불한다고 답변을 주셨는데
질문게시판 무색계는 물질계가 아니기에 관한
답변에서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정녕 성불은 해탈 열반은 인간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무색계에 태어나면 500억겁 동안 아래의 세계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를 잃어서 성불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처는 인간계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
No. 129 |
| 이
름 |
김희준 |
2005-07-08 |
| 남 긴
글 |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포항교사불자회 향운 김희준입니다.
오늘 우연히 천리안 카페 '천불동' 전체 회원 소식 메일을 통하여
교수님의 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홈페이지를 만나는 인연을 얻었군요.
교수님이 우리말로 옮기신 용수보살님의 중론 3부작을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근기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서요.
포항교사불자회에서도 교수님을 가을 쯤에 한 번
찾아뵙고, 교수님의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인연이 생기기를 부처님전에 가만히 기원드려봅니다.
우선 급한대로 교수님의 강의를
이 홈페이지를 통하여 포항교사불자회 회원들이 접할 수 있도록 교수님 홈페이지 주소를 교사불자회 홈페이지에 올려 놓으렵니다.
늘
건승하시길 빕니다.
|
No. 128 |
| 이
름 |
김성철 |
2005-07-03 |
| 남 긴
글 |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에는 짐승의 몸을 받았을 때에도 배고픈 다른 짐승에게 몸을 보시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이런
선업들이 축적되어, 성불 후 부처의 복덕을 구족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축생의 삶이 악업의 과보로 초래된 삶이긴 하지만,
축생으로 살면서 선업과 악업을 짓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사향사과의 성인 중 아나함은 색계 이상에 태어나 그 곳에서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는 성인입니다. 색계 이상의 천상에서 수행의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또, 육도윤회 중생 모두에게 12연기의
이치가 작용하는데 십이연기설은 자업자득의 인과응보설이기에 그 어떤 세계에서도 선업과 악업을 지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No. 127 |
| 이
름 |
원명 |
2005-07-03 |
| 전자우편 |
bluelotusam@hanmail.net
|
| 남 긴
글 |
안녕하세요? 궁금하게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6도 윤회에서 사람몸을 받았을 때만이 업을 짓고
천상이나 축생, 혹은 다른 몸을 받았을 때는
업을 받
기만 하느 건가요? 천상에서나 짐승몸을 받고도 선업을
지어 3선도 혹은 해탈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
No. 126 |
| 이
름 |
이대길 |
2005-06-28 |
| 남 긴
글 |
바쁘신 가운데 불구하고
소상한 답글 주심에 감사올립니다.
잘 양지했습니다. |
No. 125 |
| 이
름 |
김성철 |
2005-06-28 |
| 남 긴
글 |
불교의 시간관과 공간관,
즉 우주론을 알고자 하는 것은 결코 우문도 아니고 희론도 아닙니다. 초기불전은 물론이고 후대 아비달마 문헌에도 우주론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초기불전의 무기설(無記說)에서 '세간은 상주하는지 아닌지, 세간이 유변(有邊)인지 무변인지'와 같은
물음에 대해 부처님께서 답을 하지 않으시는데 이런 문제는 우주론이 아닙니다. 세간 상주의 문제는 전생과 현생이 이어지는지 단절되어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고, 세간 유변의 문제는 현생이 내생으로 이어지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은 불상부단, 불일불이의
연기 관계에 있는데 이를 상, 단 여부를 묻기에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답하신 것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불교 신행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세히 파악해야 할 중요한 교리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에서 윤회의 현장, 윤회하는 모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고집멸도 사성제 가운데, 고제(苦諦)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회의 진상은
'일체개고'입니다. 윤회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 열반을 진심으로 희구할 수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
내에 올려진 불교TV 강의에서 '11.삼계설 ... 17.십이연기설3'의 일곱 개 강좌 중 '초기불교의 우주론'에서 불교의 우주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삼계설은 '공간론'이고, 십이연기설은 삼계 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삶에 대한 '시간적
조망'입니다.
<시간론> 시간적으로 볼 때 우주는 無始無終하게 '성, 주, 괴, 공' 한다고
합니다. 우주는 성립되었다가(成) 머물다가(住), 파괴되었다가(壞) 텅 비고(空), 다시 성립되었다가 머무는 등의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
합니다. 마치 삼각함수의 싸인 곡선과 같이...
한 번 성주괴공하는데 80겁이 걸리고 이를 대겁이라고 합니다. 성겁, 주겁, 공겁,
괴겁 각각의 기간은 20겁이며 이를 중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겁을 소겁이라고 합니다.
사물은 생주이멸하고, 중생은 생로병사하며,
우주는 성주괴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호흡이나 신체감각의 무상을 자각하는 수행이지만, 이 거대한 우주 역시
무상합니다.
<공간론> 삼계설과 삼천대천세계설이 불교의 공간론입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에 삼계가 하나
갖추어져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태양은 별에 다름 아닙니다. 밤하늘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별마다 이런 삼계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체는 이곳 태양계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어디든지 살고 있습니다. 광막한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우리가 윤회하며 태어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무색계는 물질계가 아니기에 공간적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시간에 따른 공간의 변화> 우주가 성주괴공함에 따라 삼계도 수축, 팽창 합니다. 우주가
파괴된 공겁의 시대가 되면, 모든 중생은 삼계 가운데 색계의 제2선천 이상 하늘나라에 올라가 산다고 합니다. 색계 제2선천 이상은 빛과
같은 미세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에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손에 만져지는 물질은 파괴할 수 있어도, 빛은 만져지지 않기에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제2선천에 살던 중생 가운데 그 선업이 가장 먼저 소진된 중생이 제2선천에서 탈락하며 초선천에 태어나는데 이 생명체가
'창조주 행세를 하는 대범천'입니다. 대범천은 '나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이다'라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세계는 중생의
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대범천은 대망어(큰 거짓말)죄를 짓고 있다'고 비판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 홈피에 올린 불교TV
강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No. 124 |
| 이
름 |
이대길 |
2005-06-27 |
| 남 긴
글 |
교수님께
청법합니다.
1)시간과 공간에대한 불교의 우주관은 어떤지요?
어리석은 우문(고의 해탈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희론)이라 조심스레 여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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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23 |
| 이
름 |
이대길 |
2005-06-26 |
| 남 긴
글 |
자등명(?)하겠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소상히 알려 주시는 교수님의 자비로운 모습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문에는 네가지
유형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아는 것을 너도 아느냐는 test목적. 둘째는 나의 지식을 과시하기위해 상대에게 알리기위한
것 셋째는 질문의 내용이 앞뒤가 안맞고 이상한 형태 넷째는 진실로 알고자하는 구도의 질문 일 것입니다.
대신
사과를 올립니다.
*자등명;어떤 상에 의지말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 그러나,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다르게, 용어의 선택이 잘못
사용된 듯함.꼭 쓰고자 한다면,나는 당신에게 묻지않겠습니다.이유는 나 보다 모르니까요...라는 표현이 더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No. 122 |
| 이
름 |
김성철 |
2005-06-26 |
| 남 긴
글 |
이 홈피에 들어오는 다른
많은 분들 역시, 오온에 대한 '분별적 이해'에 관심이 많을 것 같아서, 다시 답글을 올립니다.
아래, 아래 글을 올렸듯이, 오온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사태에 오온이 모두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체법에 대한 세 가지
분류법(三科說)에 대해 설명할 때 오온설은 상근기를 위한 것, 12처설은 중근기를 위한 것, 18계설은 하근기를 위한 것이라고
평합니다.
色, 受, 想, 行, 識의 오온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色'은 객관대상이고, 가장 뒤에 있는 '識'은 주관인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관이 객관을 대하듯이 '識'이 '色'을 대하는데, 色과 識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마음작용이 受, 想,
行입니다.
受는 보통 느낌이라고 번역하는데, 고,락,불고불락의 세 가지입니다. 괴롭고 싫은 느낌, 즐겁고 좋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느낌은 대부분 무덤덤한 느낌들일 겁니다.
想은 생각이라고 번역되는데,
범어로 samjna(특수표기 생략)라고 씁니다. 'sam'은 '함께'란 의미이고 'jna'는 '앎'이란 의미이기에 '함께 모아서 아는 것'이라고
풀이되는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연합(association)과 거의 그대로 일치합니다. 심리적 연합이란 '조건반사적 앎'입니다.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종소리'를 들은 개가 먹이를 떠올리며 침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상온의 작용입니다. '종소리'와 '맛있는
먹이'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데,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울림으로써 개에게 '종소리=먹이'라는 생각이 각인됩니다. 우리가 눈으로
귤을 볼 때, 입에 침이 고이는 것 역시 이런 상온의 작용입니다. 귤의 둥그런 모양과 주황색은 신 맛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 어릴 때부터 귤을
먹어 보았기에, 귤의 형상만 보면 신 맛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관계가 없는 양자를 관계시키는 것'이 상온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온의 작용과 관계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머리 속에 자동차의 영상이 떠오릅니다. 원래 'ja-dong-cha'라는 소리와 실재의 자동차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심리적 연합이 일어나서 'ja-dong-cha'라는 소리와 실재의 자동차가 '필연적 관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짐승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바로 상온입니다.
行은
'조작'이라고 번역됩니다. 그 원어가 samskara이기에 '함께 모여서(sam) 지음(kara)'이라고 풀이됩니다. 즉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함께 모여 짓기'가 행의 의미입니다. '탐, 진, 치, 만' 등의 번뇌와 같은 갖가지 심리현상도 행이지만, 사물의 세계에서 인연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건은 모두 행입니다.
구사론에서는 세상 만사를 '5位 75法'으로 분류합니다.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행법, 무위법이 5위인데 이런 5위의 항목에 속하는 갖가지 법들을 75가지로 정리한 것이 5위 75법 이론입니다.
색법은
5근인 '안이비설신', 5경인 '색성향미촉', 그리고 무표색의 11가지로 재분류됩니다. 무표색(無表色)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색'이란
의미로 우리의 의식의 내용(法處) 가운데 포함되기에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계할 때 '앞으로 살생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표색입니다. 이런 다짐은 평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무표), 살생의 기회가 왔을 때 수계의
다짐을 떠올리고 살생을 하지 않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패인 골'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受와 想은 심소법에
속합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항상 존재하기에 '우리가 언제나 밟고사는 땅과 같이 큰 토대'라는 의미인 '대지법(大地法)'에 소속시킵니다.
行은 다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마음과 관계된 행'(心相應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과 관계된 것만은 아닌
행'(心不相應行)입니다. 마음과 관계된 행은 아래에서 얘기했듯이, 갖가지 번뇌들입니다. 마음과 관계된 것만은 아닌 행에는 생, 주,
멸, 명, 구, 문 등이 있습니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을 의미하는 생주멸의 경우,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나지만,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서 '교만한 마음'이 발생했다가 소멸하기도 하지만, 외부 세계에서 '천둥 소리'가 발생했다가
소멸하기도 합니다.
명, 구, 문은 문장, 단어 등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사유할 때도 이런 문장이나 단어를 사용하지만, 외부
세계에 속하는 '책'이나 '비석'에도 단어나 문장이 쓰여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주멸, 명구문 등을 심불상응행법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말한 2.受, 3.想, 그리고 行 가운데 심상응행, 즉 심소법에 속하는 4.行이 1.色과 2.識 사이에서 작용하는
마음작용(심소법)입니다. ------
이상 '색, 수, 상, 행, 식' 각각에 대한 '분별적
해설'입니다. ------------------
아함경의 '근,경,식(촉)-->수-->상-->행'은
12연기설과 관계됩니다. 12연기설에서 '...육입, 촉, 수, 애...'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촉 -> 수'의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일 뿐입니다.
12연기의 각 지분 모두 오온을 갖추고 있습니다. 각 지분의 오온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을 지분의 이름으로
삼았기에 12연기 각 지분은 '증상연(增上緣) 관계'를 갖는다고 합니다.
12연기 각 지분을 펼쳐놓으면 삼세양중인과적이고
태생학적인 연기설인 <分位緣起>로 나타나고, 쌓아놓으면 한 찰나에 12지분 모두가 중첩되어 쌓여있는 <찰나연기>로
나타납니다. 언어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는 전자는 通時的 조망, 후자는 共時的 조망이라고 풀이되는데, 통시적 조망과 공시적 조망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12연기의 두 측면일 뿐입니다. 불교TV 강의 중 12연기에 대한 해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수험생이 문제를 풀 때든, 그 어느 때든 오온은 모두 관여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음악을 듣고 무엇을 떠올릴 때 역시 오온 모두 작용합니다.
음악소리는 색온, 음악소리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수온(기쁨, 덤덤함 등등) 음악소리를 들으며 무슨 악기소리인지 연관시키는 것은
상온 음악소리에 집중하는 것 등의 의지적 행위는 행온 음악소리를 아는 것은 식온입니다.
참고로 구사론에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에 대해 요리에 비유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 그릇 수: 감자, 두부 등 음식
재료 상: 소금, 고추가루 등 양념 행: 요리하는 것 식: 요리된 음식을 먹는
것
----------------------
...오온은 찰나생멸인데 어떻게 무상함을 관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찰나생멸이란 말이나 무상하다는 말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초기불전에서 가르치는 무상을 아비달마교학에서는
찰나론에 의해 정교하게 이론화 합니다.
그리고 질문은 '흘러가는 것을 어떻게 관하는지?'란 의미 같은데,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관해 보면, 아까 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런 수행의 목적은 '고'와 '무아'(안주할 곳이 없음)를 알게 하는 것이고, 결국 열반을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
오온을 관찰할 경우 그 관찰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
오온을
관찰할 때에도 오온 모두 동원됩니다. -----------------
그리고 불교교리를 접할 때, 이론체계의 논리적 정합성도
추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론들의 취지입니다.
초기불전이든 아비달마교학이든 그 이론의 정합성을 끝까지 추구하면
항상 모순이 발견됩니다.
이런 모순을 드러내는 불교사상이 바로 반야 공사상이고, 중관학입니다.
초기불교교리나
아비달마가 내적 모순을 갖고 있지만, 그 취지를 수용할 경우 그런 교리는 우리의 인식과 감성을 정화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목과 같이....
----------------
불교연구에서 초기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불교학계의 상식'입니다.
대승교학이 초기불교사상과 수미일관한 체계가 되도록 살려내는 것이 불교학의 과제 중 하나입니다.
또, 초기불전을 연구해도 불교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양파'는 알맹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먹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
권성우님의 질문에 대해 개괄적 답을 해 보았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권성우님은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분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공부에는 '지식공부'와
'감성공부'의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성공부는 '교만한 마음'(만), '화내는 마음'(진), '탐내는
마음'(탐)을 정화하는 공부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정화되어야 이 세상, 이 윤회의 세계에 대해 맺힌 한이 모두 없어져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진심으로 희구할 수 있게 됩니다.
불교공부에서 지식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성공부입니다. 수학에서 미분학
문제를 풀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하는 것이 '덧셈과
뺄셈'이듯이...
|
No. 121 |
| 이
름 |
권성우 |
2005-06-25 |
| 남 긴
글 |
교수님..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후대?불교적이고
대승불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오온에대한 조망이라고 생각됩니다...
초기불교의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어떤 불교공부도
모래위에 쌓은 집처럼 견고하지 못하고
잘못하면 지적유희로 그칠 위험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초기불교교리와 수행체계는
생각할수록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건 21세기 불교학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등명하겟습니다....
|
No. 120 |
| 이
름 |
김성철 |
2005-06-24 |
| 남 긴
글 |
권성우님 오온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불교TV 강의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가운데 초기불교 부분이나 구사학의 5위 75법
부분 중 어딘가에 설명되어 있을 겁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온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원래 '한 덩어리의
사태'인데 언어에 의해 이를 분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부산 범어사 강원에서 중관학 특강을 하고 왔는데, 오온과 관련하여
오늘 범어사에서 한 강의 내용 중 한 가지 소개합니다.
--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가르치는데, 수상행식 역부여시란 말을 풀면 수즉시공 공즉시수 ... 상즉시공 공즉시상 ... 행즉시공 공즉시행
... 식즉시공 공즉시식 ... 이란 말이 됩니다.
색도 공이고, 수도 공이고 ... 식도 공이란 말입니다.
수학에서
A=B C=B
라면
A=C
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공 수=공 상=공 행=공 식=공
이기 때문에
색=수=상=행=식
입니다.
즉 색이 수이고 수가 상이고 상이 행이고 행이 식입니다. 또 수가 식이고 행이
색이고 식이 상이고 색이 수입니다.
부처님이 마른 똥막대기 이듯이....
---------
우리 눈 앞에
컵이 보일 때, 이 컵은 '색'이면서, '수'이면서, '상'이면서, '행'이면서, '식'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을 따로
따로 떼어 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건은 오온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
그리고 행은 범어
samskara의 번역어입니다. 구사론의 5위 중 '수와 상을 제외한 심소법 전체'와 '심불상응행법 전체'가 모두 행입니다.
인간의
경우 탐, 진, 치, 만의 번뇌 모두가 행법에 속합니다.
--------------
그리고
<보리도차제론>(또는 <사분율>) 등에서는 불교를 설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청하지 않으면 강설해서는 안 된다. 2. 요청해도 그 요청자의 그릇을 보아 응한다. 3. 앉은 자에게 서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4. 누운 자에게 앉아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5. 높은 자리에 앉은 자에게 아래 자리에서 강설해서는 안 된다. 6.
앞서 걷는 자에게 뒤따르며 강설해서는 안 된다. 7. 자세가 불손한 자(팔짱을 낌,삐딱하게 섬)에게 강설해서는 안 된다. 8.
가축이나 탈 것에 오른 자에게 강설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가 마구니가 되고 정법이 오히려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
이상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입니다.
앞으로 이 게시판에 올라온
글 대부분에 대해서는 답글을 올리겠지만, 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No. 119 |
| 이
름 |
이대길 |
2005-06-24 |
| 남 긴
글 |
교수님 좀
고생하시겠습니다.허허허 |
No. 118 |
| 이
름 |
권성우 |
2005-06-24 |
| 남 긴
글 |
교수님....
교수님께서 초기불교전공이 아닌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식물의 경우처럼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실것 같아서 한가지 질문드립니다...제 생명관이 조금 변했습니다....^^
보통 불교에서 修行한다라고 할때 행을 닦는다고
합니다... 즉 팔리어로 상카라(형성)을 닦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그만큼 불교가 마음의 형성력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온의 정신적인 요소 "수상행식"중에서
언제나 잘 구분이 가지않고 모호한 부분이
상,행,식입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쓰여진 불교개론서를 보면 보통은 상은 인식,표상,지각으로 번역되고 행은
형성,의지,결합,사고작용 식은 역시 인식,식별,요별,의식작용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함경을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행이
思로 되어 있으며 인간의 광범위한 정신작용중 대부분을 행(思) 에 넣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책을 보면
색수상행이 식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식이 가장 중추적이고 광범위한 정신작용이라고 합니다..(콘제 인도불교사상사)
어떤 분은
오온은 순서없이 모두 함께 찰나생,찰나멸 이라고 이야기하고 함께일어나는 오온中에서 어떤 지분이 강한가가 중요시된다고
합니다..
혹은
전반적으로 색-->수-->상-->행-->식의 순서로 일어난다라고 하는분도
계시고
그런데 또 아함경을 보면 근,경,식(촉)-->수-->상-->행 으로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불교하면 "오온무아"인데 오온의 이해는 불교의 중추요 심장인데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선명하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령 사지선다형의 문제지를 받은 수험생이
추리,유추,사고해서 답을 정하는 과정을 놓고 보자면
색수상행식이 모두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업을 만드는 요소는 없기때문에 행은 제외해야
하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예로 상상하는 작용(음악을 듣고 무엇을 떠올린다면)은 상,행,식중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도
알고싶습니다...
다른 예로 오온이 찰나생멸인데 어떻게
색이 무상함을 관하라.. 수가 무상함을
관하라... 상이 무상함을.. 행이 무상함을... 식이 무상함을 관찰할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오온을
관찰한다며 그 관찰하는 기능은 상인지 식인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지 혹은 불성(아뜨만)인지 알고 싶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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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17 |
| 이
름 |
권성우 |
2005-06-23 |
| 남 긴
글 |
지난번에 글을 올리고
지운것은 잘 아시다시피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쓸데없는 쪽으로 게시판이 진행되는것 같아서 지운겁니다... 그리고는 만법의
유식성을 이해했소....
왜 나는 이런의도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왜 이선생님은 이렇게 받아들여야만할까??라고
생각했소...
물론 올린글과 문장이 좀 투박하고 정제되지는 않앗지만 무슨악의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소.... 그리고는 또한
주변의 조건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철저히 모든 주관과 판단이 변해야만하는 실존의 연기성을 재차 확인했소,...
왜 불교싸이트라고 꼭
걸맞는 이야기만 하고 그렇게 강조하는 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겁니다...
하단의 식물이야기도 숫타니파타를 근거로 해서 질문을
한것이고 자유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업과 과보의 측면도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번역된 아함경을 보고는 생각해본
측면이었데 이건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경전해석학의 문제일수도 있소....
오늘날 성서를 보더라도 “아”다르고
“어”다른것 가지고 해석되는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많은 신약성서의 판본이 전부다 조금씩 다르다오...
지난번 남조선을
이야기한것은 경주-->수운-->동학-->증산-->원불교 그리고는 “만국활개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이미지네이션되어서 글을
올린것이었는데
그런걸 가지고 엉뚱하게 문제삼을려고 하니 내가 글을 지우지 않게 되었겠습니까??
이름하여 만국을
살리는 위대한 종교사상이 한국에서 나온다는 의미요...
근세의 불교교학의 권위자이셨든 오대산의 탄허스님도 주역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한것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는 그냥 불교식으로 색수상행식이 임시로 가화합된 중생이고 불학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이 홈페이지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21세기는 다시금 불교사상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고
있는중이요....
불교는 연구되고 재해석 발굴해야 할분야가 한두가지가 아닐뿐더러
아직까지 전 세계적인 불교연구는
걸음마 단계도 되지 않았다고 목하 생각중이오...
오온의 개념만 보더라도 사실 오늘날 제대로 정립되지 않앗고 학자마다 제각기
다르오...
그리고 초기불교와 대승의 경전만 보더라도 상반되는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니오...
가령 붓다의 가르침에
근접한 “니카야”에보면 악업을 행하고 중음신이 된 중생에게 물위의 돌을 비유로 하면서 가라앉지 말아라고 기도한다고 무거운돌이 가라앉지
않겠느냐고 하는 부분과 후기경전인 우란분경같은 내용이 상반된다오....
그런데 뭐가 불교인지???
사실 따지고
들면 이런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오....
폐쇠적으로 내세울게 아니라 부단한 연구와 도모,대화,자기갱신속에서 모든 것은 창발적으로
발전해 가는것이요..^^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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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16 |
| 이
름 |
이대길 |
2005-06-23 |
| 남 긴
글 |
To;권성우씨
이 홈페이지는 동국대 김성철교수님의 불교에관한 질문과 적절한 응답을 나누는 게시판입니다. 비록
자유게시판이라고 하지만,그 자유라는 말에는 기본적인 예의와 소양이 있는 내용의 게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권씨의 올린 내용은 정체
불명의 애매한 그리고 이해되지않고 검증되지도않은 개인의 주관입니다.
여러차례 권유와 설득을 권씨에게 해보고 있으나 권씨본인은 전혀
개의치않는 듯 무시하는 데...도데체 정체가 무엇인지?
불교를 내세우는 척하면서,타종교를 선전하는 것같기도 하고,아니면 남조선이라는
표현을 하는 걸봐서 신고를 해야할지 그리고 본인의 주장을 지우고 나갔다가 다시들어오는 이런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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